사도행전 26장 24-29절 모든 사람이 나처럼 되기를 - 옥한흠 목사
설교제목 : 모든 사람이 나처럼 되기를
설교본문 : 사도행전 26:24-29
설교자 : 옥한흠 목사
60년대 군사정권이 들어 선 후에 정치적인 문제 혹은 사상적인 문제로 끌려가서 여러 달 동안 미결수 신세가 되어 포승을 차고 재판을 받으려고 드나드는 인사들의 얼굴을 가끔씩 텔레비전으로 본 일이 있습니다. 이제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나 얼굴들은 까맣게 다 잊어 버렸습니다만, 그들 중 몇 사람이 남긴 강한 인상은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포승을 차고도 당당해 하는 태도, 평안한 얼굴, 활짝 웃는 웃음, 이런 것들이 저에게는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조금도 비굴하거나 추해 보이는 데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저 정도로 소신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면 존경할 만하다' 하는 생각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괴롭힐 때 천황을 하나님이라고 추켜 세우면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신사 앞에서 절하라고 강요를 많이 했습니다. 이 때 생명을 걸고 '아니요' 라고 외치면서 투쟁했던 목사님들 가운데는 거의 대부분이 수 년 동안 감옥에 끌려가서 모진 고생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순교하여 다시 살아서 나오지 못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기록 을 통해서 보면 형무소에 들어가서 어려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목사님들이 가끔 마당에서 서로 만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서로 쳐다보고 이렇게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홍포를 입으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청포를 입고 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 믿음 흔들리지 맙시다."
이렇게 격려하면서 서로가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보면 얼마나 멋있습니까? 너무 나 당당하지 않습니까?
재판정의 바울이 시간 우리는 비슷한 인상을 우리에게 주는 한 사람을 지금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니 훨씬 더 강한 인상, 진한 감동을 주는 사람 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재판정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는 왕과 총독이 앉아 있고, 그 옆으로 는 내노라 하는 권력가와 유명인 사들이 전부 배석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사도 바울이 한 유명한 말 이 있습니다. 29절이 그 내용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말이요, 당당한 선언입니다.
아그립바 왕이 "네가 짧은 몇 마디 가지고 나를 예수 믿게 할 모양인데 참으로 가소롭구나"라고 비웃 는 투로 말을 했을 때 바울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서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다 " 그 다음에는 쇠고랑을 찬 손을 번쩍 들면서 "이렇게 결박 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소원합니다."
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 당당함입니까? 죄수가 지금 재판석에 있는 판사들 을, 왕들을 상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가만히 보면 누가 재판장이고 누가 죄수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는 법정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쇠사슬이 사도 바울의 자유를 빼앗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왕과 총독의 위엄과 권세가 그의 용기를 꺾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바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라고 자꾸 전하니까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이 그를 모함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감옥에다 쳐 넣었습니다. 벌써 감옥에 들어간 지 2년이 다 되어 갑니다. 바울이 가만히 생각하니 유대인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팔레스타인을 빠져나가야 되는데 죄수의 몸으로 빠져나가는 길은 딱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황제에게 상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가야 되니까 유대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있으면 석방이 되어도 생명이 위험한 처지였습니다. 그래 서 그는
"나는 로마에 가서 로마황 제에게 재판을 받기를 원합니다."
라고 상소를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상소를 하니까 지방 장관인 총독은 그를 이제 로마로 보내야 합니다. 그렇지만 죄수를 로마에 보내려면 뭔가 정확한 범법 사유가 있어야 보낼 수 있는데, 바울을 아무리 신문해 봐도 특별한 혐의 사실이 없었습니다. 황제에게 보 낼 만한 잘못을 저지른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아그립바 왕이 자기를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이 베스도 총독은 잘 됐구나 생각하고는 그 왕에게 자 기의 고민을 자초지종 이야기 했더니, 왕이
"그러면 내가 한번 신문해 보지요."라고 하여 본문(사도행전 26장)의 재판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 대상자의 유형
우리는 먼저 재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 여야 할 사람들의 세 가지 유형을 그 재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석에 앉아 심문을 하는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왕, 버니게라고 하는 여자, 이 세 사람은 참 흥미롭게도 우리가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가서 전도할 때 흔히 만나 볼 수 있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 사람의 배경을 살펴보고, 그들의 지위를 염두에 두 고, 또 재판석에서 한 말들을 우리 가 참고해 보면 각자가 지니고 있는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믿습니까? 믿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물 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토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복음을 효력 있게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를 좀 알아야 합니다. 대상을 바로 알면 이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적을 바로 알면 승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분석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세 사람은 우리가 만나는 전도 대상을 분석하는 일에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유형 1. 베스도 : 오해와 편견 의 소유자
우선 베스도를 한번 봅시다. 그는 현직에 있는 유대나라 총독입니다. 우리는 총독하면 빌라도만 생각합니다. 빌라도는 몇 십 년 전에 거쳐간 사람이고, 이제는 베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총독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황제로부터 임명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로마에 충성하는 황제의 대리자라고 할 수 있고 식민지의 정치와 군사와 사법의 모든 통치권을 감독하고 관할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가 재판석에 앉아서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바울은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23 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수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고, 그래서 앞에 있는 왕들과 앞에 있는 재판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달 될 수 있기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고 사흘만에 부활했다 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이 베스도 총독이 참다못해 가지고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작은 소리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소리 질렀습니까?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이것은 점잖케 번역한 것입니다. 좀 더 현대말로 바꾸면,
"너는 미쳤어. 네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해 가지고 돌았구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재판석에 앉은 점잖은 사람 이 갑자기 이렇게 소리를 꽥 지르고 미쳤다 하는 걸 보면 베스도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좀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미쳤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우리는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남 몰래 오해가 많은 사람이고,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교회에 좀 열심히 다니면 "광신 자'라고 하거나, 예수 믿자고 권하면
"예수는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나 가면 되지, 뭘 나보고 믿으라고 하느냐?"
라고 하는 자기 나름의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교인 그리고 신앙에 대해 오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베스도 총 독이 그와 같은 유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우리 주변에 베스도와 같은 사람이 참 많은 것을 봅니다. 오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거 없는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고, 대적하기도 하고, 우리를 코너에 몰아 붙이려고 하는 그런 경우를 자주 봅 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오해 가 봇물이 터지듯이 많아지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며칠 전 어느 일간지 신문 기자와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기자니까 세상 물정을 환히 잘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 기자에게 먼저 물었습니다.
"옷로비 청문회 사건을 전후해서 요 사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어떻게 봅니까?"
그랬더니 기자가 씩 웃으면서 말해 줍디다.
"생각했던 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다르더구만 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래 교인들을 보면서 그들의 신앙과 행동이 다른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흔히들 생각했는데, 이번에 청문회 나온 사람들이 한 손으로는 성경을 들고 맹세를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고급 옷 을 걸치고, 한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기도 하고 거짓말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렇구나' 라고 다들 판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부끄럽기도 하고 분통이 터졌는지 모릅니다.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요.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다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이중적인 표리가 다른 말, 거짓말만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이것은 진짜 오해요, 이것은 진짜 편견입니다. 몇 사람을 보고 기독교 전체를 싸잡아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정말 오해요, 정말 편견 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그렇잖아요? 이렇듯이 밑 도 끝도 없이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종말론 신앙 때문에 집단 가출을 하는 것이 한국 교회 전부입니까? 잘못된 신앙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살기 싫으면 아예 떼거리로 산에 가서 천막 쳐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다 오해요, 편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이런 오 해와 편견을 가지고 은근히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 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만나야 할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유형2. 아그립바 왕 : 관심은 가지나 거부하는 사람
아그립바 왕을 한번 봅시다. 아그립바 왕은 이 재판에서 주심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탄생할 때 핍박하던 악명 높은 혜롯 대왕의 증손자(曾孫子)입니다. 그리고 나이도 지금 20살 내외인 아주 젊은 왕입니다. 그는 유대 나라의 모든 물정과 종교에 밝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유대 나라 상황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뭐라고 하는지 그런 말을 들으면 다 알아듣는 사람이었습니 다. 또 '예수님이 메시야다 아니다' 라는 주장을 가지고 유대 나라에서 가끔 언쟁들이 일어나고 또 어려운 사건이 생긴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상대해서는 상당히 진지하게 말을 합니다.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왕이여 선지자들이 예언 한 말씀을 믿고 계십니까? 저는 믿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왕에게 접근합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듣던 왕이 뭐라고 반응합니까? 28절에서 아그립바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 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런 말입니다.
"네가 몇 마디 말 가지고 예수 믿게 만들려고 하는 모양이구만."
여기서 '적은 말로'하는 말은 '짧은 시간에' 라는 말로 바꾸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네가 짧은 시간에 날 예수 믿게 만들려고 설득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겉으로는 상당히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만 속으로는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관심이 있어 보이고 믿을 것 같아서 가까이 접근을 하면 그만 거부 반응 을 일으키면서 뒤로 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아그립바 왕의 유형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 에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전도해 보면
"그래요. 맞아요."
하면서 고개도 끄덕여주고
"믿으면 좋은 일이죠."
라고 수긍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금 말씀을 더 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면
"예, 하십시오."라면서 한참동안 들어줍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사람이 신이 나서 '야, 오늘 좋은 형제 하나 예수 믿게 만들 수 있겠다.' 라고 기대를 하고 속으로 ' 주여, 주여' 하면서 열심히 전했는데 맨 마지막에 가서는 뭐라고 말을 합니까?
"너무 날 설득하고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 이 정도 해 둡시다. 때가 되면 믿을 기회가 오겠지요."
하고는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아그립바 형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이런 분 참 많습니다.
유형3. 버니게 : 무반응과 냉소주의
세 번째로 버니게라고 하는 여인을 좀 봅시다. 버니게는 아그립바 왕의 누나입니다. 이 여자는 여러 번 결혼을 했는데 다 실패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못된 구석이 있는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갈데가 없으니까 동생에게 와서 얹혀 있는데 자기가 마치 왕비나 되는 것처럼 행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세간에는 이 오누이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많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저 두 사람 이상하다. something이 있다.' 오누이 관계도 something이 있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훗날에는 유대나라에 여행을 온 로마 황제의 아들 티투스를 얼마나 꼬리치면서 유혹을 했는지 그의 정부가 되어 로마까지 가서 살았던 대단한 여자였습니다.
20대 초반의 미모의 여자, 권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에 물든 그 사람이 지금 재판석에 와서 앉아 있는데, 한낱 죄수에 지나지 않는 바울의 말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전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이 엉뚱한 데 가 있는 여자인데 바울이 선지자가 어떻고, 예수가 어떻고, 십자가에 죽었고 하는 말들이 귀에 들릴리 만무합니다. 그저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한번씩 바울을 내려다 보았을 것입니다. 내려다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어쩌다 저 꼴이 됐을까? 어쩌다가 저 모양이 되었지? 정말 참 불쌍해.' 이런 생각만 하고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성경에는 그와 같은 이 야기가 없어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사는 재미가 하도 나서 흔히 이야기하듯이 깨가 쏟아지게 재미있고, 젊고 아름답고 자신만만하고 겁나는 것 없는데 '예수 믿고 천국 가 자.' 그런 소리가 전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들으면서도 실상은 온통 딴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불쌍하다. 어쩌다가 저 모양이 됐지? 허우대는 멀쩡한데 왜 저런 짓을 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버니게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복음에 전혀 반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만나야 될 사람들 중에는 이런 분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모두가 복음을 들어야 할 자들
이와 같이 재판석에 앉아 있는 인물들을 통해서 전도할 때 만나게 되는 세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편견과 오해 때문에 도전적으로 나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 말의 관심은 가지면서도 나중에는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 아니면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우 리는 이런 사람들을 상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울처럼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사람을 구별하여 전도하는데 차별하면 안됩니다. 버니게형은 좋다, 아그립바형은 좋은데, 베스도는 싫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유형만을 골라잡으면 안됩니다.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만나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유형의 사람이든지 그들이 처한 형편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어 떤 형편에 그들이 처해있습니까? 18 절을 참고해 보십시오.
18절은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사도 바울을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파송하시면서 왜 그를 보내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주님이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려고 내가 너를 보내노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보면, 세 상 사람들은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사람들입니다. 영적(靈的)인 것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못 보고 예수님도 볼 수 없습니다. 그 들의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 가에 대해서도 깜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해서 예수 믿게 하 면 그들의 눈을 열어주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만나서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어두운 눈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눈을 뜨고 자기가 죄인인 것도 알고 하나님 이 살아 계신 것도 알고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주님이 돌아가신 것도 알게 됩니다. 전도가 눈을 열어 주는 일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또 전도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합니까?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사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노예(奴隸)들입니다. 한 사람도 자유인이 없습니다. 모두가 악령(惡靈)의 권세(權勢)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그들은 완전히 쇠사슬을 매고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믿게 하면 그들은 그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합니다. 할렐루야! 죄(罪)로부터 자유합니다. 악령(惡靈)의 권세(權勢)에서 해방(解放)됩니다. 믿습니까? 전도가 이런 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도하여 그들이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신 말씀처럼, 용서 받지 아니하면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받는 놀라운 축복을 얻어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후사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신경 쓸 것 없어요. 그저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 저런 사람이구 하는 것만 판단하면 됩니다. 그들은 모두가 똑같이 영적으로 맹인이요, 영적으로 죄 사함 받아야 되는 사람이요, 사탄의 노예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企業)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福音)을 들고 그들에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전도 할 때 사람을 골라 잡으면 안 됩니 다.
복음증거자의 무장
이제 우리의 눈을 돌려서 재판석 아래에 홀로 서 있는 사도 바울을 좀 주목합시다.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한 사람이었으므로 옷도 허름하였을 것입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얼굴은 초췌하고 머리 손질도 제대로 못한 체 헝클어진 모습으로 나와 서 있습니다. 손에는 쇠사슬을 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초롱초롱합니다. 그의 얼굴은 평안합니다. 그리고 그 가슴에는 피가 끓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를 처다 봅시다.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상대가 왕이든 총독이든 구애받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예수님의 심정, 사도 바울의 심정을 배우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철저하게 무장한 복음 증거자로서의 마음 자세를 우 리는 들여 다 보게 됩니다.
그의 마음은 무엇으로 무장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29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마음을 적어도 3가지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지 않고는 왕 앞에 서 가지고 감히 '왕이여,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총독이여,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쇠사슬에 결박 당한 것 외에 당신들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소리를 어떻게 함부로 하고 있겠어요? 뭐가 있기에 그런 소리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바울이 그렇게 담대하게 왕이여,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3가지로 그는 무장을 하 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소리가 가능한 거예요.
구원의 감격과 확신으로 무장
첫째는 구원의 감격으로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29절을 큰 소리로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 이다."
아멘! 얼마나 대단합니까?
바울이 이렇게 큰 소리로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마음 속에 구원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놈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다는 감격 말입니다. 이렇게 악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리시려 고 자기가 십자가에 대신 생명을 바쳐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오는 감격 이 그의 가슴에는 언제나 활화산처 럼 불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쓴 신약성경의 서신서들 을 보면 바울은 항상 이 감격을 가지고 흐느끼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만 생각하면 우는 것입니다. '내가 어쩌다 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까?' 하고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훼방자요, 핍박자였 는데, 나는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를 핍박한 사람이었는데"라는 말을 그는 자주 씁니다. 그가 이런 고백을 자주 읖조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는 전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이런 말하지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 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 내가 괴수니라."
이 말 속에 담긴 그의 본심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많은 죄인들이 있지만 그 죄인 가운데 나는 가장 악질적인 죄인이다. 그러므로 다른 죄인들은 구원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 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 가?' 라는 감격이 그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사도 바울의 심정을 뜨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는 이 감격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 같은 것이 예수 때문에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라는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 주체치 못하는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하시는지 정말로 희한하구나, 어떻게 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받게 되었는지' 그것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격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바울처럼 내가 가난할지라도 내가 세상에 이름 석자 내놓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울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당신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소리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감격 때문 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이 구원의 감격을 매일 느끼는 사람도 있고,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처음 믿은 얼마 동안 은 가슴이 뜨겁고 너무너무 감사해서 나도 모르게 찬송도 부르고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싹 식어 버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십자가 이야기를 들어도 고개 만 끄덕거리지 가슴은 냉랭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왜 구원의 감격이 자꾸 식어지나? 저는 한가지 이유를 들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바울처럼 자기를 죄인의 괴수로 보는 시각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는 그래도 좀 낫다.'라는 약간의 우월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고, 그렇게 아주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나는 그 정도로 악한 사람은 아니야. 나는 바울보다는 좀 나은 사람이야.' 하는 생각이 밑바닥에 조금이라도 깔려 있으면, 이런 생각이 결국은 구원의 감격에 찬 물을 끼얹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수가 성 여자는 남편 5명 갈아치우면서 형편 없는 인생을 살았는데, 그 사람이야 죄인이지, 진짜 죄인이지, 창녀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더러운 과거를 갖고 있지 않아. 나는 조금 나아.' 나도 모르게 이렇게 좀 낫다 고 하는 생각을 마음에 숨기고 있으면 바울이 체험하고 있던 이 구원의 감격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구원의 감격이라는 것은 '나는 정말 못 쓸 놈이고, 정말 창녀보다 더 악한 놈이고, 스데반을 죽인 바울보다 더 나는 독한 놈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이상하게 나를 불러 서 하늘의 영광을 안겨 주었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때 감격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수가성의 창녀나 매일 강단에서 거룩한 말씀만 전하는 옥 목사나 똑같습니다. 분명히 이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죄인이면 다 죄인입니다. A+ 죄인이 있고 A- 죄인이 있습니까? 하나님에게는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모두가 다 똑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제가 항상 강단에서 잘하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에 태어나서 한 생 을 손발 꼼짝 하지 아니하고 살다가 가도 그 사람 역시 죄인"이라구요. 인간의 실존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행동 몇 가지 덜 했다 더 했다 그것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항상 바울처럼 제일 밑바닥의 죄인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죄 인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 나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어. 정말 나는 불가능한 사람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어!' 이런 생각을 가질 때 비로소 내 마음에 감격이 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면서
"당신 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전도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구원의 감격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 구원의 감격이 복음을 전하는 내 말에 묻어 나가야 됩니다. 나의 표정에서 상대방이 읽을 수 있도록 무언가 드러나야 됩니다. 그럴 때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마음에 뭉클하고 뜨거워지는 무엇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감격이 없이 어떻게 복음이 전달될 수 있겠습니까?
자존심으로 무장
바울은 두 번째로 자존심으로써 무장하고 있습니다. 재판석에 앉아 있는 왕이나 총독, 왕비 같은 여자와 죄수로 서있는 바울을 비교해볼 때 바울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그들과 비교하여 무엇을 자랑하고 긍지를 가질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은 조금도 꿀리지 않습니다. 조금도 그들을 부러워하는 기색도 없습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나는 하나님 앞에 소원합니다."
그 말속에 담겨 있는 바울의 가슴에 있는 긍지를 한번 들 여 다 보십시오.
'나는 비록 쇠고랑을 차고 있는 몸이지만,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 다. 나는 비록 이와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맡긴 사도입니다. 조금 후에는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있는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하는 긍지 와 자부심이 사도 바울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총독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별것 아닌 인간적인 허세를 가지고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 못 합니다. 모두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긍지를 가지고 복음 을 전하니까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현대 교인들을 보면 이런 긍지가 많이 죽은 것 같습니다. 우 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당당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그들은 얼굴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요즘 보면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각성 전도 집회를 하니까 전도는 해야 되겠고, 사람은 만나야 되겠고 해서 찾아갑니다. 그러나 찾아가서는 집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집 구경하고, "이 장롱 어디서 샀습니까? 너무 이쁘네요."
부인이 입고 있는 옷을 보고는 "그거 어디서 나셨어 요? 라스포사에서 맞췄나요?" 이러 면서 온통 부러워 가지고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러면서 한참을 보내다 보면 전도가 어디 있습니까? 과연 그런 자세를 가지고 "당신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나는 당신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말 이 더 나을 것입니다.
초창기에 우리 교회 나오시던 30 대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신앙 생활 잘 안 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양옥집을 짓고 30대에 그렇게 세상 부러운 것이 없이 살 정도니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 집에 식모랄 수 있는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집에 기거하면서 집안 일을 도와 주던 이 50대 되는 아주머니는 늘 얼굴이 평안하고, 부엌에 나가서 일을 할 때도 자주자주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렇게 항상 기뻐하는 모습을 그는 주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어느 날 주 인 아주머니가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내가 볼 때는 아주머니는 하나 도 가진 것도 없고, 세상적으로 재 미 있게 사는 것도 없어 보이는데 뭐 가 그렇게 좋아서 날마다 찬송하고 기뻐하고 그래요?' 그러자 그 아주 머니가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네, 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세요. 나, 예수 믿잖아요. 그게 저는 기쁘답니다. 그런데 주인 아주머니는 참 세상적으로 보면 다 가졌어요. 내가 볼 때 모든 것 다 가진 것 같은데 한 가지가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그것을 주인 아주머니는 가지고 있지 못 한 것 같아요."
비록 식모로 그 집에 얹혀 살지만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긍지가 있습니까?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속 사람을 무장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무장
세 번째 마지막으로 바울은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정으로써 마음을 무장하였습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이렇게 결박 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
라고 간절하게 호소하는 사람이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 없이 어떻게 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이 훨씬 불쌍한데. 오히려 불쌍하지 않은 사람에게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할 때는 그 마음에 무엇인가 그들을 향하여 애타는 연민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연민의 정이 있습니까? 히브리서9장27절에서 하나님은 무엇이라 고 말씀합니까? "한번 죽는 것은 정 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 으리니."
우리는 그 심판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압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눈이 어두워서 심판을 모릅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심판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러면서 죽으면 끝난다고 하는 편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죽음 다음에 심판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18장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심판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심판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베스도 총독, 버니게 왕비를 쳐다보면서 그들이 나중에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면 서 바울의 가슴은 너무나 아픈 것입니다. '세상 살아봐야 몇 십 년인데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저 사람들이 어떻게 견딜까?'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나 저미어 오는 것입니다. 불쌍하다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말을 담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라인에 30가정 있는데, 최근에 어떤 분이 이사를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으니까 이사 오기 전에 그분은 굉장히 큰 집에 살았다고 합니다. 100평이 훨씬 넘는 맨션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반 이상을 줄여서 우리 아파트에 왔는가 하면, 아주 호화로운 맨션에 살 때 가끔 가다가 문틈으로 어떤 쪽지가 가끔 끼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당신, 얼마 얼마를 미리 준비하고 기다려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는 공갈 협박하는 글이 적혀 있었답니다. 잘사는 집이었으므로 누가 장난으로 그랬겠지만 그런 공갈을 한 두 번이 아니고 자꾸 당 하니까 불안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거 이러다가는 큰 일 나겠구나. 큰 집에 살다가 식구들이 몰살당할 지도 모르겠다.' 라는 공포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중요한 것은 식구들을 안전하게 하는 것이니까, '도둑놈들이 별로 신경 안 쓰는 아파트로 가자.' 이렇게 하여 우리가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그 사연을 전해 들었을 때 협박꾼들이 공갈 치는 말에 겁이 나서 좋은 집도 내 버리고 이사를 하는데 하나님이 준비한 심판을 저 사람이 안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처럼 깡패들의 협박은 무서워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므로 예수 믿을 생각을 전혀 안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말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얼마 전부터 저는 우리 아파트 동에 살고 있는 30가정의 가장들 이름을 전부 적어서 성경책에 끼워 놓고 다닙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 믿는 가정은 불과 한 5가정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아침이나 저녁에 저는 아내 와 함께 그 쪽지를 펴 놓고 한 가정, 한 가정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가면서 기도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너무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연민의 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대각성 전도 집회를 앞두고, 내 사랑하는 가족 중에 아직도 믿지 아니하는 사람, 내 직장 의 동료나 오래 사귄 친구들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아니 면 얼굴도 모르지만 이웃에 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관심을 갖고 기도 하면서 찾아가야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야 합 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바울처럼 무장합시다.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무장합시다. 바울처럼 자존심을 가지고 무장합시다. 바울처럼 연민의 정을 가지고 무장합시다. 그러면 우리 앞에 아그립바왕 같은 인간을 만나든지 버니게와 같은 사람을 만나든지 베스도와 같은 사람 을 만나든지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 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복음 을 전하면 우리를 통해서 성령은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에 충만해지는 날이 반드시 올 줄을 믿 습니다. 이런 은혜를 달라고 이 시 간 우리 모두 기도 할 수 있기를 바 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