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장 19-21절 희생 없는 전도는 없다 - 옥한흠 목사
설교본문 : 사도행전 11:19-21
설교제목 : 희생 없는 전도는 없다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행11장19-21
행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얼마 전 신문에 가족이 함께 차 를 타고 가다가 강물에 빠진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의 두 아이를 건지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하여 애들은 살렸지만 그는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그 만한 대가를 지불할 때 가능한 일입 니다. 영적인 생명을 살리는 전도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을 하지 않고는 전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하려면 빈 손으로 안됩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희생 없이는 생명을 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하여
"죽었 다"라고 선언합니다. 살았으나 실상 은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라고 정 의합니다.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즉..."
(롬5:15)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 하여 전 인류가 죽음의 노예가 되었 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세상에서 70-80년 동 안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할 수 없 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대단한 것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눈에 는 이 세상에서 몇 십 년 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 의 삶은 마치 어항에 있는 고기가 그저 몇 달 살다가 죽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아침의 이슬처럼, 안개처 럼 금방 사라지는 것이 인생의 길이 요,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하 나님이 인간들에게 원래 의도하신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인생이 소유하고 있지 못하 므로 하나님 눈에 인생은 단지 죽은 것에 불과하며, 없는 것이나 마찬가 지인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전도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은 인생이 다시 살아날 수 있 는 길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여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 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복 음을 전하면 듣고 믿는 자가 살아납 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 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 이라."라고 말하였습니다. 복음은 죽 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라는 뜻입니 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가 영원한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는 능력 이기에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 즉 전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 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라는 것을 전혀 알 지 못합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고 린도전서1장21절은
"하나님의 지혜 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라고 말 씀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머리가 똑똑하고 남보다 더 출중하 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죽었다는 것 을 압니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제대로 압니까? 전혀 모릅니다. 그 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가 구 원받을 수 있을까? 내가 살 수 있을 까?'라고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세상 의 지혜로는 결코 자신이 처한 영원 한 죽음의 운명을 알 수도 없고, 그 죽음에서 구원받을 방법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인간의 운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참으로 기이한 한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주 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 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라고 바 울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방 법으로 하나님이 마련하신 전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미련한 것입니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 믿으십니까? 예수 좀 믿으시 죠."
하면 '뭐 이런 이상한 놈이 다 있나. 재수 없게시리...' 이런 눈으로 쳐다봅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전 도는 너무나 어리석은 방법인 것입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를 통하여 사 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예수 를 믿어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미련해 보이는 이 전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전도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선교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할만한 가치 있는 일 이 바로 전도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희생
구원을 위하여 성삼위 하나님께 서 제일 먼저 희생을 치렀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어떻게 희생하였습니 까? 자기 외아들을 포기하셨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 내는 희생을 치렀습니다. 성자 하나 님은 어떻게 희생했습니까? 자기 생 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았습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 을 바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어떻게 희생했습니까? 그는 이 세상 에 오셔서 교회 안에서 이 세상 끝 날 때까지 떠나지 않고 계십니다. 이처럼 성부, 성자, 성령 삼위하나님 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희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매우 좋은 예를 말 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 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장24절) 여기서의
"한 알의 밀"은 누구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자신, 성령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부, 성 자,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 썩는 밀알이 되신 것 입니다. 하나님이 희생함으로, 하나 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희생 없이는 생명 을 건질 수 없습니다.
복음 증거자들의 희생
하나님만이 희생하신 것이 아닙 니다. 하나님의 희생에 동참한 자들 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 원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 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된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하여 희생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 다. 누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 물로 기도해 주었기에 내 심령이 열 려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 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 덕분에 내가 오늘 예수 믿은 것입니다.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 수의 '예'자도 모르는 시골 마을에 선교사님이 오셨습니다. 산 넘고 물 건너 저 깊은 벽촌까지 선교사가 찾 아 와서 보리밥 먹어가면서 모기 쫓 아가면서 그들과 함께 며칠을 보내 며 서툰 한국말로 전도했습니다. 그 때 증조 할아버지가 먼저 예수 믿었 습니다. 그리고 무지무지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교사 와 증조 할아버지가 치른 희생의 대 가로 구원이 제게 임하였고, 오늘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를 위한 누군가의 희생 없이 과연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전 인구의 1/4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통계를 내놓을 만큼 부흥 하였습니다. 전 세계 교회가 놀라고 부러워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러나 이와 같은 축복을 누리게 된 배후에는 엄청난 피가 있었고, 눈물 이 있었고, 땀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피와 눈물과 땀은 계속하여 흘러내 리고 있습니다.
27살 때에 선교하기 위하여 영 국에서 중국으로 머나먼 바닷길을 건너온 토마스 선교사, 그러나 중국 으로 건너오자마자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는 중국 한 모퉁이에 붙어 있는 한반도에 사 는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민족은 아직도 예수 를 믿지 않고 있으며 복음을 들은 일이 없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내 를 잃은 슬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말로 된 성경책을 배에 싣 고서 대동강을 따라 올라왔습니다. 그 때는 대원군이 한참 쇄국 정책을 펴고, 카톨릭 신자들을 잡아죽이는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가서 성경을 전해 주려고 노력을 하 다가, 결국 우리 관군들의 공격에 의해 배가 불타게 되고, 그는 강변 으로 끌려 내려 칼날에 맞아 순교를 했습니다. 순교하는 그 순간에 그는 자기 목을 치는 사람에게 성경을 던 져 주며
"이것을 읽어보시오."라고 소리치고는 죽었습니다. 그를 칼로 친 사람이 그 성경을 주어서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읽고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의 피가 그 강변에 흘렀기에 그 피 값으로 오늘 우리가 존재하게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 면부지의 이 땅에 와 쏟은 수많은 벽안의 선교사들의 피와 땀을 먹고 우리의 생명은 싹텄고, 한국교회라 는 나무는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우 리의 생명이 기초하고 있는 이 희생 의 반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양화진에 가면 많은 사람들의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한국에 복음 을 전하기 위해서 1세기 전에 이 땅 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풍토병에 걸 리고 적응하지 못해서 죽은 어린 아 이들의 무덤과 어떤 선교사 부인의 무덤이 있습니다. 명대로 살지 못한 젊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명의 선교사들입니 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 습니다. 이 빚진 감정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희생 없이는 생명이 살아 나지 못합니다. 희생 없이는 지옥으 로 가던 영혼이 천국으로 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희생하셨는데 어떻게 희생 없이 전도가 되겠습니까?
안디옥교회를 세운 희생
본문을 보면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디옥으로 와서 전도하게 된 배경 이 19절에 있습니다.
"때에 스데반 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 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 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좀 더 자세하게 이 구절 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 습니다. 120여명 되는 사람들이 성 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가 부활하 셨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살아나 셨다. 너희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 가 살아나셨다."라며 두려움없이 담 대하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 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하루에 삼천 명, 오천 명씩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 다. 하루아침에 예루살렘이 교회로 바뀐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 도로 온 성에 있는 사람들이 부활하 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백성들이 되 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나자 악한 사단과 그 영들이 드 디어 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 자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 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분 을 믿으십시오. 그 분을 믿으면 당 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습니다. 영원 한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십니다."라고 외치던 평신도 전도 자 스데반을 끌어다가 돌로 쳐죽였 습니다. 피 맛을 들인 무리들은 사 나운 야수가 먹이를 덮치듯이 믿는 자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감옥 에다가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그 들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그리고 공중 앞에 사람들을 끌어내서
"예수 를 욕하라. 예수를 모욕하라. 그러면 내가 석방해 주겠다."라며 회유했습 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다 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죽임을 당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핍 박이 예루살렘을 하루아침에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 무서운 핍박을 피하 여 많은 성도들이 가까이는 사마리 아 지방으로부터 유대 나라 멀리 북 쪽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그 중 어 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450km나 떨어진 안디옥이라는 도시까지 흘러 들어갔던 것입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2,000년 전인 그때에 인구가 50만 명이 넘었을 정도로 거대한 도 시였습니다. 도시의 중앙대로 길이 는 6km나 되었고, 바닥은 대리석이 아주 아름답게 깔려 있었으며, 길 양쪽에는 대리석 기둥이 가로수처럼 쭉 서 있었고, 당시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밤에 가로등을 켜 놓고 있 었던 도시입니다. 굉장히 화려하고 번화한 도시였으므로 로마제국 각지 로부터 수많은 부족과 다양한 민족 들이 몰려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도시의 종교는 온 민족의 신 들로 뒤범벅이 되어 몹시 혼탁해 있 었고, 성적으로도 방탕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번영한 항구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쾌 락에 젖어서 흥청망청 살아가는 도 시였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뉴욕시 가 갖는 이미지와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귀족으 로 살던 사람들은 은퇴하면 안디옥 에 와서 별장을 짓고 거기서 여생을 보내는 것을 큰 소원으로 삼았습니 다. 그들은 그곳의 온천에 들어가 목욕을 하면서 음담패설이 난무하는 잡담을 즐기거나, 아니면 경마장에 가서 돈을 걸고 도박을 하면서 즐겼 습니다. 그야말로 형편없는 도시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시체들만 가득한 공동 묘지와 같은 곳이었습 니다.
이러한 도시로 핍박을 피해 도 망 온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들어온 것입니다. 대부분은 유대 사람을 상 대로 전도했지만, 구레네와 구브로 지방 출신의 몇 성도들이 혤라 사람 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 다.(20절)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 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 고 주께 돌아오더라."(21절)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들 이 복음을 전하자
"주님의 손이 그 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이 그 들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그들과 함께 하시어 안 믿을 것 같은 무수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도무 지 들을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귀 를 기울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는 돌아온 것입니다. 놀라운 일 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리하여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 다. 안디옥 교회는 세계 선교의 발 상지입니다. 이 교회에서 바울과 바 나바가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주치의로서 일생동안 그의 충성된 동역자로 함께 일하였던 의 사 누가가 이 안디옥 전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이처럼 몇 사람의 전도로 인하여 안 디옥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 니다.
어떻게 이런 경이로운 부흥이 짧은 시간에 안디옥에서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 대답은 매우 중요하 지만 의외로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 자들은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자들이었기 때문입 니다. 값을 가장 비싸게 지불한 사 람들이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역 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핍박을 피하여 성을 빠져 나온 이들의 수중에는 한 푼도 없었을 정 도로 온통 다 털리고 나온 사람들이 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도 제 대로 데리고 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 릅니다. 그리고 성을 빠져 나왔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었습 니다. 얼마나 외로웠겠으며, 얼마나 그 마음이 허전했겠습니까? 기댈 사 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계속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 수 때문에 신세를 망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신앙 때문에 그 정도로 신세 망쳤으면 예수 믿으 라는 말을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입 니다. 오히려 신앙을 포기하고 예수 를 저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러나 그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 만나 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님이 우리의 메시야, 그리스도입니 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전하 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복음을 위 하여 그들의 전 삶을 대가로 지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곤 생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마저도 아끼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바치겠다는 사람들이 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주님의 제 단에 올려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기에 그 전도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는 것 입니다. '예수가 누구이기에 저 사 람들은 예수 때문에 온통 다 빼앗겨 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면서도 저렇게 얼굴에 기쁨이 충만해서 날 보고 예수 믿으라고 하는가? 예수란 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영생을 얻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자연히 들게 되며, 상 대방의 진지함에 감동을 받는 것입 니다. 이처럼 성령이 강하게 역사 하는 전도의 현장에는 반드시 생명 을 거는 희생자들이 있습니다. 반대 로 희생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능력 있는 전도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희생
우리 모두는 진지하게 스스로에 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한 영 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 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 리가 구원받은 것은 매우 귀한 사건 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만 구원 을 누리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 습니다. 절대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 밖에서 죄인들 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이 유는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 다리는 잃은 양들을 찾아서 하나님 의 집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심정을 알면서도 어떻게 손 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요? 아무런 희생과 노력없이 내 이 웃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 까요? 희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 썩어 문드러진 한국 사회가 치료되 어 건강한 나라로 거듭나기를 기대 할 수 있을까요? 희생 없이 과연 이 러한 일들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결코 불가능합니다. 희생 없이는 생 명도 갱신도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 다.
친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 이 구원 받기를 기도하는 것도 보통 큰 희생이 아닙니다. 저 역시 몇 사 람을 놓고 시간을 따로 내어 정기적 으로 기도를 하는데 참으로 쉽지 않 다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기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내 자식들이라면 과연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내 애들 같으면 그냥 대충하거나 안 할 수도 있을텐데...' 이처럼 피곤하고 바쁘고 쉬어야 되 는 시간인데도, 그들을 생각하면서 계속 엎드려서 기도한다는 것은 작 은 희생이 아닙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만한 대 가도 치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은 영혼이 살아날 수 있을까요?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으로 멸시를 받거나 자존심을 구기는 일들도 있습니다. 굉장한 희생이지요. 자신을 위해서 는 구두쇠처럼 살면서도 상대방을 위하여 돈을 써야 될 때도 있습니 다. 그를 위해 돈을 쓴다고 해서 그 가 나를 알아줍니까? 이 바쁜 세상 에 중요한 약속이나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일부러 시간 내서 만나는 것 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우 큰 희생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만나 준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의 마 음과 정성을 이해하고 고마워합니 까? 이해하기는커녕 어떤 때는 귀찮 아하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수고 하나 하나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활활 타 오르며 향기를 토할 때, 죽은 생명 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 니다. 우리도 이러한 희생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지 않았습니 까? 그러므로 다른 사람도 우리 자 신의 그와 같은 희생을 통해서 예수 를 믿어야 합니다.
최근에 나온 교회 신문인『우리 지』에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몇 가 지 있었습니다. 신동아아파트의 순 장들이 지난 5월부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여리고 성 기도」를 시작했다는 기사가 그 중 하나입니다. 「여리고성 기도」 가 어떤 것입니까? 아파트 단지를 하루에 한번씩 돌면서 기도하는 것 입니다. 닭장같은 아파트를 쳐다보 면서 그 닭장 속에 있는 모든 죽은 영혼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여호수아 와 그의 군대가 여리고성을 매일 한 바퀴 돌듯이 돌면서 기도하는 것입 니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도전적인 이야기입니다. 보통의 희생을 각오 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입니다.
잠실 우성 다락방 어느 순장은 3월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순원들과 함께 두 시간씩 그 지역에 있는 영 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 다고 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을 쉽게 접촉하기 위해서 남이 싫어하 는 반장 일도 자진해서 맡았다고 합 니다. 이것이 어찌 쉬운 각오이겠습 니까?
서초동지역을 맡아 있는 11개 다락방 순장들은 6월부터 매주 화요 일마다 모여서 약200여명의 태신자 를 놓고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전도단에 소속되어 있는 어느 집사님은 김포에 개척된 사랑 의교회에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해 주고 싶어서 일부러 그곳까지 가서 주변의 아파트를 다니며 전도를 했 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이 하루 종 일 100가정의 벨을 눌렀지만 문을 열어 준 가정은 오직 한 가정뿐이었 습니다. 그런데 그 문을 열어준 가 정이 예수기로 결신하고 그 다음 주 일 김포사랑의교회로 출석 했습니 다. 100번의 큰 희생을 지불하고서 야 얻은 생명입니다. 이와 같은 수 고, 이 정도의 땀을 흘리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은 영혼이 하 나님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는 기적 은 생길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쓴 『Why not the best?』(왜 최선 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글을 읽 고 깊은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 다. 그는 수십 년 전에 자기 교회의 전도집회를 10년 동안 참가했었다고 합니다. 매년마다 전도집회가 열렸 는데 매년마다 14가정을 꼭 책임지 고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0 년 동안 그 전도집회에 참석했으니 까 140가정을 전도한 것입니다. 매 우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10년 동안 140가정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였 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예수 믿 은 사람도 있다.'라는 은근한 자부 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데 그가 66년도에 주지사로 출마를 하여 선거운동을 하였는데, 3개월 동안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악수 를 했다는 것입니다. 주지사에 당선 된 뒤 그의 마음에는 부끄러운 가책 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3개월에 30만 명을 만나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서는 14 년 동안 겨우 140가정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니... 이것은 보통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카터 전 대통 령이 느낀 가책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가책을 받아 야할 부분은 없을까요? 자신의 목표 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붓고, 없는 시간도 억지로 라도 만들고, 돈도 아낌없이 쓰며 전력을 다 기울이면서, 하나님이 찾 고 계시는 잃은 양, 기회 놓치면 영 원히 망할 수밖에 없는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는 시간도 별로 안 드 리고, 돈도 안 쓰려고 하고 관심도 별로 기울이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 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 라는 말을 하기에는 참으로 부끄러 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을 위한 희생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사랑이라는 나무는 희생을 먹고 자 라기 때문입니다.
사랑의교회 장애인 선교를 담당 하고 있는 김해용 목사님이 지난 여 름 LA의 몇 교회가 연합하여 개최 한 「장애인 사역을 위한 세미나」 에 주강사로 초청받아 그곳의 많은 분들하고 좋은 교제를 나누고 돌아 왔습니다. 그들 중 어느 남자 집사 님의 이야기를 목사님이 전해 주었 습니다. 그 집사님은 한국을 떠난 지 벌써 30여 년이 되었고, 그곳에 서 상당한 기반을 닦아 이제는 큰 걱정 없이 살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사랑의교회가 10월에 『대각 성 전도집회』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김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 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아직도 예 수님을 안 믿는 친구들이 있는데 아 무래도 내가 그들을 전도해야겠습니 다. 그들을 내가 태신자로 정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대각성 전도집회때 그들을 그 집회에 인도 하기 위하여 내가 그때 한국으로 가 야겠습니다. 그리고 미국에도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내가 한국으로 들어갈 때 그 친구를 데리고 같이 가야겠습 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 이 일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러한 정성과 마음을 쏟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의 희 생적인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누구 나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정성과 마음, 노력과 수고와 희생과 눈물과 땀과 지출이 따를 때,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 다.
희생이 아니라 축복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살펴보았는 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매우 중 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하고 값을 치른다고 해도 그 것을 무슨 대단한 희생이나 한 것처 럼 생각하거나 생색내서는 안 된다 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첫 번째, 우리가 아무리 전도하 기 위해서 많은 값을 지불했다고 해 도 자신이 하나님이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치르신 그 희생을 생각하면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 다.
두 번째,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빚 진 것 생각하면 내가 지금 조금 하고 있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 다. 전도는 내가 진 빚을 갚는 것일 뿐입니다.
세 번째, 한 영혼을 전도하여 하 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영원 히 멸망당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생명을 영원히 살리는 너무나도 가 치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을 위해 애쓰고 투자한 것이므로 우리의 조그마한 수고를 희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네 번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충 성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엄청난 하나님의 상급을 약속하고 계십니 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그 나라에서 주님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너무 수고했어. 너무 잘했 어."
하시며 우리에게 주실 영광의 상급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전도하느라고 수고하고 애쓴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엄 청난 영광의 상급에 비교할 때 우리 가 이 세상에서 땀 흘리고 조금 수 고한 것을 가지고 희생했노라고 감 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사랑의교회에서 WEC선교대회가 있었는게, 그 선교 단체를 창설한 C.T. 스터드라고 하 는 위대한 선교사는 항상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말 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야 합니 다.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일하다가 생을 마친 아프리카 선교 의 선구자요, 대영 제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아프리카의 개척자 리빙스턴 이 16년간 밀림에서 선교하다가 잠 시 영국에 귀국했을 때의 이야기입 니다. 그는 27번째 말라리아에 걸려 사선을 헤매다가 아직 회복이 제대 로 되지 않은 연약한 몸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사자에게 물린 한쪽 어깨와 팔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 고 마치 썩은 나무토막 마냥 몸에 힘없이 달려 있는 나약한 모습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설교를 한 일 이 있습니다. 그는 설교에서 이렇게 도전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영 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 그 일을 위해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을 놓고 즐거워하지 아니한 날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 서 많은 희생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하나님께 진 큰 빚의 작은 부분을 갚았을 뿐인데, 이것을 어찌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장차 영광스러운 소망과 복된 상급을 약 속 받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 것이 어찌 희생이 되겠습니까? 자신 이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한다라는 말과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절 대로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 이라고 말하십시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날 영 광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결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심정을 가지고 전도하 고, 선교해야 합니다.
지난 8월에 5,268명이라고 하는 사랑의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장기기 증을 하겠다고 약속하여 매스컴에서 크게 보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위 기를 몰아가거나 담임목사가 장기기 증을 하라고 자꾸 강조를 해서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으로 장 기기증을 약속한 것이라 더욱 화제 가 되었습니다. 뇌사 시 장기기증을 하겠다는 사람이 2,668명, 골수기증 을 약속한 사람이 160명, 신장기증 을 약속한 사람이 140명, 그리고 1,580명은 죽으면 시신을 병원에 기 증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이 기록을 보고 받고 곰곰이 생 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런 힘이 어 디서 폭발한 것일까? 아무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 기의 장기와 시신, 자기의 육신의 일부분을 내어놓겠다고 결심하는 이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두 가지 정도로 그 이유를 생 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나 의 조그마한 희생으로 누군가가 평 생의 고통에서 자유케 되어 행복하 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 로 가치 있는 삶이 아니겠느냐?"라 는 마음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 명을 살리는 일만큼 가치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설교한 목사님이 주었던 삶의 감동 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평생동안 매 년 수 차례씩 헌혈하고, 장기기증 운동에 너무나 헌신한 나머지 자녀 의 이름마저도
"또 뽑자. 또 뽑자.
"하여
"박뽑기"라고 이름을 짓고, 자신의 신장을 벌써 몇 년 전에 기 증하여 한 생명을 살렸다는 그 분의 삶이 굉장한 감동과 도전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삶에 감동을 받아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귀한 줄 깊이 느끼게 되었고, 한 육 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소 중한 육신이라도 기꺼이 내어놓겠다 라고 하는 놀라운 헌신이 일어난 것 입니다.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영혼을 살리 는 일입니다. 우리가 장기를 기증하 여 그 사람이 새 생명을 얻어도 기 껏해야 70-80년의 삶이 연장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그 사람에 게 영원히 사는 생명을 선물하는 것 입니다. 결국에는 죽어질 육신의 생 명을 위해서도 기꺼이 희생을 치른 다면,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어찌 희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 목사의 헌신적인 삶에 감동 을 받는다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받은 그 감동 은 얼마나 큰 것일까요? 사람에게 감동을 받고도 자신의 장기를 기꺼 이 내어놓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 자가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이라면 어떻게 전도를 안 할 수 있을까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어떻게 희생 하지 않겠습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희생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신 주님의 사 랑에 감동 받은 우리가 무엇인들 못 하겠습니까?
전도는 희생 없이 할 수 없습니 다. 왜냐하면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희생을 해 도 주님의 은혜에 감동된 사람은 그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 다. 우리가 이런 자세를 가지고 전 도한다면 성령의 역사가 우리와 함 께 하실 것입니다. 한국이 변화되며, 이 지역이 변화되는 놀라운 일이 일 어날 것입니다. 완고하게 마음을 닫 고 있고, 적대감을 품고 우리를 공 격하던 그 불신앙의 영혼들이 성령 의 능력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온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줄 믿습니다.
슈테른베르크가 그린 유명한 예 수님의 그림이 있습니다. 머리에 가 시관을 쓰고 빌라도와 유대인들 앞 에서 조롱을 받으면서 서 있는 예수 님의 모습입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 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하 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 느냐?"
이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은 하버겔이 쓴 찬송가가 185장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주님의 은혜에 감동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구원을 받도록 조그마한 수고로부터 큰 희 생에 이르기까지 값을 치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자 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 기지 아니하는 사랑과 열정이 있습 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 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 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 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이 처럼 자기 자신 전부를 불태울 수 있는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통하여 예 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구주의 사랑 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랑이 사람들 로 하여금 어두움에서 깨어나게 합 니다. 그 사람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합니다. 그 사람들의 눈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부활의 영광 앞에서 환희하는 새 생 명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즐겁 게 희생할 수 있는 사람되기를 바랍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