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민수기

민수기 13장 25-33절 불신앙과 메뚜기 사고 - 옥한흠 목사

재영구리 2023. 3. 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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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민수기13:25-33
설교제목 : 불신앙과 메뚜기 사고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잠복성 불신앙

하나님을 잘 믿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믿지 않게 되거나,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이 대단한 사람 같았는데 어떤 상황에 직면하자 그 믿음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너무나 힘들 정도로 산산조각 나는 경우들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평상시 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대단한 믿음을 소유한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 가서는 커튼 뒤에 가려졌던 불신 앙의 용암이 분출되는 신앙의 행태를 일컬어 소위 '잠복성 불신앙'이라 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잠복성 불신앙에서 자유롭지 못 합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고 항상 하나님을 의지 하며 살아가노라고 고백하지만, 어떤 문제에 부딪혀 보면 내 속에서 믿음의 기운이 다 빠져 나가버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혀 안 믿고 있는 나의 모습이나 못 믿고 있는 모습, 심지어는 믿으려 하지도 않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평상시에는 전혀 그 존재를 알 수 없다가 마치 컴퓨터 바이러스가 가만히 잠복하고 있다가 어느 시 점에 갑자기 활동하기 시작하여 컴퓨터 시스템을 마비시키듯이 우리의 믿음의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신앙의 모습을 일컬어서 '잠복성 불신앙'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 속의 마그마나 용암과 같이 우리 속에 잠복해 있어서 평소 에는 잘 안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 어떤 계기가 마련되면 화산이 폭발하고 용암이 급속도로 흘러내려 도시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듯이 이 불신앙도 아주 작은 순 간에서도 터져 나와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굉장한 피해를 주기 쉽습니다.

민수기 13장을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 400년 동안이나 애굽 땅 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얼마나 그 생활이 고달프고 힘들었던지 그들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목이 터 져라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라고 하 는 위대한 지도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으로 그들을 애굽 에서 해방시켰습니다. 남녀노소 도 합해서 2백만 명이 넘는 민족의 대 탈출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민족에게서도 400 여 년 동안이나 종살이하던 상태에 서 민족적으로 해방된 사례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이 출애굽의 해방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애굽을 나온 후 크고 두려운 광야 길을 걸어 26절에 나오는 바란 광야 가데스라고 하는 곳까지 여행을 했습니다. 그곳까지 오는 데 약 2년 정도 걸렸습니다. 가데스부 터 시작되는 지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불릴 정도로 참으로 비옥하고 모 든 것이 갖추어진 완벽한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수백 년 전부터 그 들의 조상에게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이 이 곳 바네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의 땅은 그저 얻을 수 있는 무주공산의 빈땅이 아니었습니다. 들어가기만 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두 손을 들고 환영해 주는 그런 땅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걸어왔던 광야 길은 싸움 한번 안 하고 지나온 길이지만, 이 바네아로부터 들어가는 가나안 땅은 싸워서 이겨야 얻을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일곱 부족이 수백 년 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보다 뛰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강한 성과 전투력을 소유한 족속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서는 이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싸워서 쫓아내야 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이 가나안의 족속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전투를 해야한다는 현실은 엄청난 고민 거리요, 시험거리로 떠오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데스 접경 지 대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1장 21 절 이하를 보십시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 라."

쉽게 말하면,

"진격해라. 두려 워 말고 지체없이 싸워라. 그리하면 내가 이 땅을 다 너희에게 주겠다."

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성들은 선 뜻 싸움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리며 매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격려해도 백성들은 움직이지를 않았 습니다.

"지체없이 올라가 싸우라"

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은 엉뚱한 이야기만 하면서 도무지 움직이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제기되었습니다. 정탐꾼부터 먼저 보내보자는 것이었 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서 가나안에 대한 지리와 지형, 각종 군사 정보 들을 미리 조사를 해서 유익한 정보를 얻은 다음에 그 정보를 기초로 해서 전략을 세우고, 그리고 나서 전쟁을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며, 필승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 다.

"정탐꾼부터 보내자."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그럴 듯한 제 안입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 전백승(百戰百勝)"이라 했으니 얼마나 탁월한 전략입니까?

더욱이 민수기 13장 1절을 보면 정탐꾼을 보내는 이 아이디어를 하나님께서 내놓으신 것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을 보내서 가나 안 땅을 탐지하게 하라."고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 가 40년 이전에 있었던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기록한 신명기 1장 22절 에 보면 오늘 본문에는 드러나지 않는 비사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 내용에 의하면 하나님이 정탐꾼 을 보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을 먼저 보내자고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몰려와서 떼를 썼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그들에 대 해서 아무런 첩보도 없이 무조건 전 쟁을 하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라 는 것이었습니다. 막무가내로 올라 가는 것보다 먼저 정보를 수집하여 전략을 세우자라고 말입니다. 백성들이 하도 아우성치고 떼를 쓰니까 모세는 할 수없이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지만, 그들이 꼭 그렇게 고집을 피우면 한번 정탐꾼을 보내도록 허락하여라."

결국 두 본 문을 종합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전쟁하는 것이 겁나니까 정탐꾼부터 보내자고 요구했고, 하나님은 그 요구를 거절 하지 못해 허락을 하셨던 것입니다.

'정탐꾼을 먼저 보내자'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그럴듯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이것은 지극히 정 상적인 수순이며, 승리를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전략의 첫 단추임 에 분명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의 이 제안은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맹목 적인 신앙에 빠지지 않은 건강한 모 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하나님이 원하셨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게 신속히 올라가 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정탐꾼을 먼저 보내자'는 백성들의 제안은 철저한 불신앙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제안은 그들의 마음속에 잠복해 있던 불신앙을 합리성으로 포장한 것 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럴듯한 논리 속에, 지극히 정상적인 합리적 사고 속에 자신들의 불신앙 을 숨겼던 것입니다.

불신앙의 파괴력

성경은 우리에게 정탐꾼을 보낸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비참해졌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은 고사하고, 다시금 광야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가데스 바네아의 이스라엘 60만 대군은 모두 자신의 몸을 건조한 광야의 흙더미에 뉘어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죽어서 모래밭에 묻 힐 때까지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유리방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믿음의 두 사람 외에는 한 사람도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는 허 망한 불행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우 리 안에 잠복해 있는 불신앙은 처음 에는 대단한 것 같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보여도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잠복해 있는 불신앙의 파괴력을 절대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고집 대로 결국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 12명이 정탐을 나갔습니다. 40 일 동안 가나안 땅 여기저기서 열심 히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40일이라 는 짧은 기간에 가나안 전역을 샅샅 이 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한 것을 보 면 그들은 매우 열심히 일한 것 같 습니다. 당시는 계절상 포도가 한참 익을 무렵이어서 날씨가 무더웠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열심히 정보를 수집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가데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수집한 정보들을 이스라엘 전체에게 보고했습니다. 처음에는 보고 내용이 참 좋았습니 다. 27절을 보십시오.

"모세 선생님, 우리가 가서 가나안을 살펴보았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로 젖 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은 너무나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갖출 것을 골고루 갖춘 너무나 이상적인 땅이었습니다."

여기까지의 보고 내용은 나무랄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입증해 보이 기 위해 에스겔 골짜기에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하나 꺾어 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포도송이가 얼마나 컸던지 장정 둘이 어깨 에 매야 운반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 다.

"이 과실을 한번 보십시오. 그 땅이 얼마나 비옥한지 이 포도송이 를 보십시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 다.

그런데 28절에 갑자기 '그러나'가 나오면서 상황은 돌변하고 맙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가나안 땅에 가서 그 성들을 보았는데 그 성채가 얼마나 견고하고 성곽이 얼마나 높은지 정말 엄청났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성이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았다."고 그들이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성의 모습을 보고 그들은 완전히 기가 꺾여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공포 에 가득 찬 얼굴로 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는 부족들을 살펴보았는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특히 아낙 자손들은 생김새 자 체가 완전히 대장부의 기골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니까 우리는 마치 메뚜기 같았습니다."

이때부터 그들은 가나안 땅을 좋게 평하던 처음의 태도를 버리고 그 땅을 악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 니며 탐지한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 입니다. 들어가서 살면 다 망하고, 뼈도 못 추릴 땅입니다."

왜 갑자기 그들이 이와 같은 정 세 보고를 하고 있을까요? 왜 가나 안 땅에 대한 태도가 돌변했을까요? 불신앙이 그 밑바닥에 작용한 것입 니다. 하나님이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땅은 좋으나 우리가 그 땅을 정 복할 수는 없다'는 불신앙이 그들의 마음을 짓눌러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병들어 버린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퍼트린 불신앙의 바이러스는 삽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오염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정탐꾼들 의 그 짧은 보고 한마디에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매일 하나님을 보면 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지극 히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떼어놓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부터 시작해서 매 일 아침 나가서 쓸어다가 요리해 먹 는 만나, 물 한 방울 없는 광야에서 바위를 깨뜨려서 물을 솟아나게 하 신 하나님의 기적, 낮의 뙤약볕을 가려주는 구름 기둥, 저녁의 그 무서운 한파를 막아 주는 불기둥, 어느 길로 가야 될지 모를 때 법궤를 따라가기만 하면 길이 열리는 그 놀라운 기적들을 그들은 매일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체험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싶어 도 부인할 수 없는 삶이 이스라엘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 속에 마귀가 들어앉아 있는 사람이라도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 나님을 부인할 수 없는 그런 삶이 바로 이스라엘의 삶이었습니다. 무 신론자 중의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먹고 있는 음식, 그들이 입 고 있는 의복, 그들이 신고 있는 신 발, 그들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불기둥과 구름기둥, 성막에 피어오르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을 보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불신자라도 무신론자라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쪽이 훨씬 자연스러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 하고 원망하는 사람들로 돌변해 버렸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사는 그들이 어떻게 이럴 수 가 있었을까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 가 지를 꼭 집고 넘어가야 됩니다. 우 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 같습니다. 말하는 것을 들어봐도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모든 역경과 환경에 대하여 일관된 믿음으로 살아가다가도 어떤 어려운 일에 직면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믿음이 송두리째 뽑히는 것 같은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비웃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나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 다. 언제나 겸손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도 불신앙의 바이러스가 잠복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잠복해 있던 이 불신앙이 고개를 들고 깨어 일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면 대단히 치명적인 위험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이 '잠복성 불신앙'이 얼마나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는가를 미리 알고 대 비를 해야 합니다.

메뚜기 사고 방식

그러면 '잠복성 불신앙'이 가져올 수 있는 해악은 무엇일까요? 제가 두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로, '잠복성 불신앙'은 우리를 '메뚜기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무엇이 메뚜기 사고입니까? 33절 이하를 보십시오. 열 정탐꾼들은 자기들이 만난 아낙 자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서 만나 본 아낙 자손은 원래 기 골이 장대하고 키도 굉장히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아낙 자손을 정탐꾼들 이 보자마자 '네피림'이 생각났던 것 같습니다.

네피림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전설적인 거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이야기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네피림은 반신반인 즉, 반은 신이요 반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이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모든 면 에서 아주 매력적인 남자들이었습니 다. 이들이 그 당시에 여자들을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시켰는지 온 세 상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둘 수 없을 정도로 부패시켰습니다. 이들로 인하여 세상에 성적 타락이 만연하여 노아 홍수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네피림은 그 당시에 세상을 부패시켜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청한 장본인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당시 네피림과 현재의 아낙 자손은 도저히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낙 자손 대장부를 볼 때 정탐꾼들은 네피림을 보는 것 같다는 환상을 가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신앙의 눈으로 그 사람들을 보니까 그런 것 입니다. 이미 두려움과 불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까 상대적으로 자기는 메뚜기 같다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밟으면 그냥 죽어 버리는 작 은 곤충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이것 이 메뚜기 사고입니다. 문제는 커 보이고 자기는 작아 보이고, 하나님은 안 보이고 세상만 보이는 이것이 메뚜기 사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8절에서도 그 땅 에 있는 성곽들을 보고 기가 질려 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살았던 애굽에 있는 성곽은 가나안의 성 곽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노예 생활하면서 쌓은 성곽 은 가나안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그런 성곽을 보았던 사람들인데 뭐 그렇게 놀랄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 러나 믿음이 없어지고 불신앙이 그 들의 의식을 사로잡으니까 작은 성 곽도 하늘에 닿을 큰 성곽처럼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메뚜기 사고입니다.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커 보이 는 것, 이것이 메뚜기 사고입니다.

불신앙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갑자기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대신 세상이 커 보이고 무서워 보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믿음으로 보지 않고 감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믿음의 눈에는 작아 보이던 것이 감각의 눈 에는 엄청나게 커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자기를 메뚜기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메뚜기 사고를 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자리 잡을 틈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메뚜기 사고는 일종의 내적인 질환 입니다. 우리 안에 만연되어 있으면 서도 금방 그 증세가 드러나지 않는 무서운 병입니다. 메뚜기 사고에 젖 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이 조금 독특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장점은 잘 보지 못하고, 그 대신 약점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신 의 잠재력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 다. 날마다 할 수 없는 일만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늘 부 정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리고 성 취하고자 하는 모험을 하지 못합니 다. 마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죽 한 그릇에 팔아 치우듯이 자신을 헐 값에 팔아 치우기를 잘 합니다. 이 와 같은 메뚜기 사고 방식은 일종의 패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 주위를 맴돌 뿐, 강하게 그 문제에 도전하고 극복하려는 용기를 가지지 못합니다. 이것이 메뚜기 사고입니 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고에 젖 어 있는 사람은 없는지 각자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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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자세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광대한 것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 하는 것이 믿음 아닙니까? 이 크고 광대하시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어떤 것도 내게는 커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 아닙니까? 다윗은 시편18편 31 절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셨도다!"

그러 므로 이런 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 는 사람은 아무리 성곽이 높아 보여 도 그것을 하나님보다 크게 보지 않 습니다. 아무리 아모리 자손들이나 아낙 자손들이 장대하게 보여도 하 나님보다는 크게 보지 않는다는 말 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열악해도 하 나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과 동행 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신을 굴복 시킬 수는 없다고 보는 자세, 이것 이 바로 믿음의 사람이 가지는 시각 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병들거나, 패 배주의로 병든 마음을 가지게 되거 나, 불신앙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별 것도 아닌 것이 네피림처럼 커 보이 고 나는 메뚜기처럼 작아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중요한 교 훈을 배웁니다. 다윗은 십대 어린 소년의 몸으로 당대의 거인 골리앗 을 상대해서 싸워 이긴 영웅이었습 니다. 골리앗이 얼마나 몸이 컸는지 성경에 나오는 그 치수를 현대의 미 터로 계산하면 키가 2미터 70센티미 터입니다. 그 키가 얼마나 큰지 상 상할 수 있습니까?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왔다 가신 빌 헐 목사님의 신장이 2미터 조금 넘습니다. 그런 데도 그 키가 얼마나 대단한지 호텔 에 가면 발이 침대 밖으로 나와서 잠을 못 잔다고 합니다. 비행기도 3 등 석은 못 탑니다. 다리가 기니까 자리가 좁아서 장거리 여행을 못하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2등 석이 나 1등 석을 탄다고 합니다. 이렇게 2미터를 조금 넘어도 무서운 키인 데, 그 키가 2미터 70센티미터 내외 니 얼마나 엄청났겠습니까? 게다가 골리앗이 입은 갑옷은 90킬로그램이 넘었고, 손에 든 창은 11킬로그램이 었습니다. 가끔 저는 11킬로그램 정 도 되는 가방을 매고 산에 가는데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그 정도의 무게의 창쯤은 한 손으로도 가볍게 흔들 수 있었습 니다.

반면에 다윗은 자기 형제들 가운 데서도 막내였던 아직은 철없는 소 년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막대기 하나를 무기라고 들고 나갔으니 그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골리 앗도 그런 다윗을 개와 장난하러 나 온 어린 소년으로 보고 코웃음을 치 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다윗은 비록 그 키는 작았고 그 모 습은 보잘것없었지만 그 생각은 대 장부였습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이 두려워하는 골리앗을 전혀 두려워하 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골리앗보 다 크시고 강하다는 것을 믿었기 때 문입니다. 그는 크시고 위대하신 하 나님이 자기편이시라는 것을 알았습 니다. 언제든지 자기와 함께 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니 골리앗은 자기가 찢어 죽인 사 자 새끼보다 못한 존재요, 자기가 쫓아버린 곰보다 못한 존재였던 것 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눈에는 골 리앗이 메뚜기처럼 보였습니다. 이 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의 시각입니 다.

'Bear(곰)'라는 영화가 수년 전에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 내 용 중에 아직 젖도 채 떼지 않은 아 주 조그마한 새끼 곰 한 마리가 두 다리로 서서 자기 보다 몇 배 큰 산 고양이하고 싸우는 장면이 있습니 다. 이 싸움의 승부는 물을 필요가 없는 뻔한 싸움입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 어린 곰이 겁 없이 산 고 양이를 상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는 '저놈이 왜 저러냐? 저 놈 대단 한데...'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 면이 바뀌면서 몇 미터 뒤에 무엇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새끼 곰 뒤에 아비 곰이 딱 버티고 서 있었 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어린 곰 이 아비를 믿고 자신 있게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자세 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골리앗도 많고, 네피림도 많고, 아낙 자손도 많고, 하늘에 닿을 만한 높은 성곽 도 많은 너무나 무서운 세상이 아닙 니까?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메뚜기로 보지 않고 하나님처럼 큰 사람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등뒤에 하나님이 서 계시기 때 문입니다.

열두 정탐꾼 가운데서 갈렙과 여 호수아만이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 움에 떠는 백성들을 향하여 독려했 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 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올라만 가자.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것이 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독려에 호 응하기는커녕 오히려 돌을 들고 그 두 사람을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바로 그 사람 자 체입니다. 잠언 23장 7절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 도 그러한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 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바로 그가 어떤 사람이냐를 결정한 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본다면 그 사람 은 대장부가 될 수 있지만, 믿음 없 이 모든 사물이나 문제를 대하면 자 신을 메뚜기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 니다.

우리 가운데 메뚜기 사고에 젖어 있는 분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 니다. 자기도 모르게 잠복해 있던 이 불신앙이 갑자기 독감 증세를 일 으키면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달라 보일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이 크게 보이고, 평소에 문제가 아 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잠을 못 자도 록 괴롭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아 마 이런 일로 고통 당하는 분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서 이 메뚜기 의식을 깨끗이 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있는 패배주의를 성령의 불로 완전 히 태워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메뚜기 사고를 이기는 법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 에서부터 이 의식을 향하여 선전포 고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마음에서 싹트고 자라는 내면의 태 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벌어 지는 전투에서 이겨야 됩니다. 불신 앙의 의식을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됩 니다. 잠자고 있다고 해서 안심해서 도 안 됩니다. 도리어 그 불신앙을 적극적으로 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싸움을 걸어 야 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을 몽땅 사로잡아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 장 4절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 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모든 생각 들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 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메뚜기 사고든, 거인 사고든 가릴 것 없이 모든 생각을 깡그리 싸서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께서 그 생각을 다스리도록 온전히 위임을 해야 합니다. 적당히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위임해야 합니다. 조 금이라도 내 속에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주실 것입니다. 메뚜기 같은 생각은 다 쓸어내 버리시고 우리로 모든 것 을 오직 믿음의 눈으로 보는 거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묵상하고, 고백하고, 선포 해야 합니다. 시편 145편 3-6절에서 시인은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 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 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 리이다.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광 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우주만물을 보 존하시면서 지키고 계신 광대한 분 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지배하실 뿐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 든 권세와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 지고 계신 크고 위대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을 찬양하 고, 고백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나 의 영혼과 마음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명령해야 합니다. 의식 적으로 그를 경배하도록 우리의 영 혼에게 명령해야 합니다. 시인은 선 포하겠노라고 다짐하고 결심하고 있 지 않습니까? 그리고 순간마다 이 하나님을 마음으로 묵상해야 합니 다. 그러면 내가 메뚜기처럼 보이는 생각은 깡그리 사라질 것입니다.

공포심

둘째로, '잠복성 불신앙'은 무서운 공포심을 동반합니다. 잠복성 불신 앙으로 메뚜기 사고를 하는 사람에 게는 필연적으로 무서운 공포심이 따라다닙니다. 열 정탐꾼들은 돌아 와서 보고를 할 때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후들거리고 있었습니 다. 그들의 말은 공포심에 휩싸여서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공 포로 떨면서 말을 하자 그 공포는 백성들에게 급속도로 전염되어갔습 니다. 모든 백성이 극도의 공포감으 로 거의 정신을 잃어 버렸습니다. 14장 1절을 보십시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온 이스 라엘이 비명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밤새도록 통곡을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공포가 사 람들의 마음을 휩쓸어 갔는지 모래 사장에 2백만 가까운 사람들이 앉아 서 비명을 지르고, 통곡을 하며, 밤 새도록 법석을 떨었던 것입니다. 그 야말로 법도 서지 않고 명령도 서지 않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 니다.

결국 그들은 끝내 이 공포를 이 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 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진격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 은 광야로 다시 되돌아 들어가 40년 동안 그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방황해야만 했습니다. 열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불신앙의 불꽃이 200여 만 명의 이 스라엘 민족 전체를 불살라버린 것 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작은 불신앙 이 믿음의 자녀들을 얼마나 비참하 게 만드는지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 속에 다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불신앙의 불씨가 없는지 말씀으로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공포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반적 인 증세입니다. 철학자 프란시스 베 이컨이 한 말을 4백 년이 지난 20세 기 초반에 프랑클린 루즈벨트 대통 령이 또 한번 반복한 것을 보면 인 간에게 있어서 공포라는 것이 얼마 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똑같이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유일한 것은 공포 그 자체 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공포를 초연한 말 같지만 사실은 그 배후에 최고의 권력자인 대통령이 든, 아니면 되는대로 사는 거지든지 간에 사람은 누구나 공포를 떠안고 산다는 진리를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공포로 둘 러싸여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라고 해서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은 근히 마음에 공포가 있을 때가 있습 니다. 그 공포가 휘몰아치는 태풍처 럼 우리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는 경 우도 적지 않습니다.

제가 볼 때 세상은 점점 무서워 져 가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유명 해진 어느 교수가

"우리는 지금 새 로운 유목민시대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정보나 돈이나 문화적 가치 가 한가하게 국경 앞에서 차례를 기 다리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 는 국경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국경 없이 온 세계를 마 음대로 헤집고 다닙니다. 시간과 공 간의 벽을 뚫고 지구 어디로든지 치 닫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이 풀을 찾아서 양 떼를 몰고 사방을 돌아다니듯이 이 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담보할 수 있는 곳이면 미국이든 아프리카든 어디든지 가야하고 생면부지의 사람 들과 더불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열린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무한 경 쟁의 살벌한 환경이 되었다는 이야 기입니다. 그런 환경에 우리가 내동 댕이쳐져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 운 현실입니까?

그러므로 삶 자체가 엄청난 도전 이며 공포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이 렇게 점점 공포의 대상으로 우리 눈 앞에 크게 다가오면, 우리는 상대적 으로 왜소하게 느껴지고 자신감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요즘 에는 젊은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상 관없이 모두가 왜소해지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교수의 말에 의하면 30대는 '일회용 반창고'라고 합니다. 왜냐하 면 어설픈 지식으로 회사에 들어가 서 한 5년쯤 써먹고 나면 그 다음에 는 외국에서 유학하고 밀려들어오는 어린 실력자들에게 자리를 다 빼앗 기고는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그 처 지가 일회용 반창고와 다를 바 없다 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 비 참한 현실입니다. 또 40대는 '이미 용도 폐기를 언도 받고 있는 세대'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회사 든 어디서든지 간에 쓸만한 지식도 없고, 힘도 없고, 감각도 둔해지고, 그렇다고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권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렇고 그런 세대라는 것입니다. 50대 는 '엉거주춤한 세대'라고 합니다. 눈치나 보면서 연명하는 것이 최고 인 세대라는 것입니다. 60대, 70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 이 젊은이나 늙은이를 막론하고 우 리 모두가 너무 왜소해 보이고 세상 은 더 큰 두려움의 대상으로 비쳐지 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소 비정 상적인 모습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 습니다. 요즘 무당, 점쟁이를 찾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 다. 이런 현상이 의미하는 것이 무 엇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을 무서 운 공포심이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 입니다. 미래가 너무 두렵고 불안하 니까, 아니 지금 이 시각조차도 너 무 불확실한 세상이니까 제 팔자도 고치지 못하고 앉아있는 무당이나 점쟁이한테 가서 뭔가 한 마디를 들 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전에 저는 <기독 문화가 위태 롭다>라는 책이 있어서 한번 읽어 봤다가 기절할 뻔 한 적이 있습니 다. 우리 나라의 무당과 점쟁이들의 1년간 총 수입이 1조 2천억 원이라 고 합니다. 1조 2천억 원이 어느 정 도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이야기는 그 1조 2천억 원 중에서 30퍼센트는 예수 믿는 사 람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는 것입니다. 3천 6백억 원이면 사랑의 교회 정도의 대형 교회 15 개에서 나오는 헌금을 다 갖다 바치는 것과 맞먹는 액수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이것이 믿어집니까? 저는 그 내용을 읽으면서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 습니다.

저자는 너무 허황된 말처럼 들릴 까봐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 었습니다. 그 역시 믿을 수 없는 이 사실을 발로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 래서 신촌의 어느 철학관 주인을 찾 아갔다고 합니다. 그 사람 말이 기 독교인도 똑같은 고민거리를 가지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찾아 와서 조 금 자존심이 강해 보이고 이것저것 캐묻기를 잘 하면 틀림없이 교회 다 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2년 동안 일부러 통계를 내 보았 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손 님의 30퍼센트 정도가 기독교인이었 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것으로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전통과 명 성을 자랑한다는 미아리 점 집들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곳은 맹인들 이 떼를 지어 앉아서 점을 보는 곳 입니다. 민들레, 처녀 예언가, 은하 수, 봉선화, 거산 도사, 거북 점등의 이름을 단 점 집들이 줄줄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손님 중 약 30퍼센트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합 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과거와 달리 요즈음은 결혼이나 진로 문제로 고 민하는 교회 다니는 젊은 청년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 운 일은 비록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못 이겨 마지못해 따라 오는 것이기 는 하지만 드물게는 전도사와 목사 도 점을 보러 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속이 타서 죽을 노릇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시 점쟁이를 찾아가 본적이 있는 사 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거듭나야 됩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예수 믿 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은 믿는다 고 착각하고 있을 지 모르지만 거듭 난 사람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데 왜 점쟁이를 찾아갑니까? 크고 광대 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인데 왜 거 기 가서 묻습니까? 영원히 살아 계 시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 내 손 에 있는데, 왜 말씀은 덮어놓은 채 허망한 그곳에 가서 쓸 데 없는 소 리나 듣고 그 한 마디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뒤척거립니까? 점쟁이 말에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의지하려는 사람은 결코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예수 점쟁이 한테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 언한다고 하니까 가서 머리 내밀고 기도 받고 뭐라고 한 마디 들으면 그것이 마치 성경 말씀이나 되는 것 처럼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 니까? 회개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에 있는 공포는 그런 식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치 유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공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공포를 느끼는 것이 자체가 불신앙의 행위 는 아닙니다. 문제가 있다면 공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공포는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 한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눈 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 어떤 공 포도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세상 속에서 당하는 이 공포의 짓눌림 속 에서 자유하며 승리할 수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내 가 가지고 있는 공포의 실체가 무엇 인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 다. 누구나 다 공포가 있습니다. 중 요한 것은 자주 나를 흔들어 놓는 공포, 나의 믿음을 전복시키는 공포 가 무엇인지 그 정체를 밝히는 것입 니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 까? '몹쓸 병에 걸리지 않을까?'하는 불안에서 오는 공포입니까? 아니면 자녀의 장래에 대한 은근한 불안과 공포입니까? 아니면 결혼 생활이 아 무래도 평탄하지 못할 것 같은 공포 입니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여 도 태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공포입니 까?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나 자신이 시달리는 공포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하십시오. 내가 자주 넘어 지는 공포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 파악하는 것이 공포를 처리하는 첫 걸음입니다.

다음으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의 크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의 크고 광대하심을 고백하십시오. 이것은 의도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 다. 어떤 때는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고백도 있지만 어떤 때는 성 령의 강권에 못 이겨서 의도적으로 고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의 영 과 마음을 쳐 복종시켜 다윗처럼 고 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문제는 커 보이고 자기 는 조그마한 메뚜기처럼 느껴지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의도적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 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 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편 27:1) 매우 의도적인 고백입니다. 다윗처 럼 이런 고백을 할 때 내 마음에 있 던 두려움이 멀리멀리 쫓겨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두려움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 도는 마귀를 대적하는 행동입니다. 야고보서 4장 7,8절 말씀은 우리를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 라."

기도로 대적하는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를 대 적하라고 한다고 해서 기도하다가 갑자기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찌어다. 이 마귀새끼야."하는 식으로 대적하지는 마십시오. 설혹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 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 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지, 마귀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우리는 기도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이 마귀를 물 리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쏟으면 기도하는 그 자체가 마귀에 게는 자기를 대적하는 것으로 보이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 오. 기도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 리의 공포를 제거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속에 잠복해 있는 불신앙은 아무 것 도 아닌 것처럼 작게 보일지라도 아 주 작은 계기를 통하여서도 우리를 망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메뚜기 처럼 생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를 걷잡을 수 없는 공포 로 몰아 넣을 수 있는 강력한 파괴 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 리는 반드시 이 불신앙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처리할 수 있습니 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고 고백하고 하 나님의 크심을 선포하고, 묵상하면 서 기도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우리가 사는 세상이, 21세기 가 요지경 같은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이 가나안 땅에 있는 성곽처 럼 높아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상대하는 불신자들이 우리보다 월등히 탁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내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기대고 그 들을 만나면 그들이 네피림처럼 아 낙 자손처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 려 있는 나는 절대 메뚜기가 아닙니 다. 할렐루야! 우리 자신을 메뚜기 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사야 41 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 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 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 라. 참으로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할렐루야! 여기서 '나의 오른 팔'은 나의 팔이 아닙니 다. 나를 붙들고 있는 전능하신 창 조주의 팔입니다. 이것을 믿고 의지 하며 당당하게 어깨를 쫙 펴십시오. 이 크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십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하 고 우리 앞에 있는 가나안 땅을 정 복합시다. 뒷걸음치지 말고 앞으로 전진합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승리 하는 자가 되어서 우리 하나님 아버 지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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