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4장 12-17절 역사에 새벽을 가져오시는 그리스도 - 이동원 목사

재영구리 2023. 3. 26. 05:07
반응형

설교본문 : 마태복음 4:12-17
설교제목 : 역사에 새벽을 가져오시는 그리스도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선생님 한 분이 어린이 주일 예배에서 이렇게 설교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어두움을 이길 수가 있을까요? 총을 꽝꽝 쏘면 어두움이 물러갈까요? 아니면 빗자루로 열심히 쓸어버리면 어두움이 사라질까요? 둘다 아니지요. 해답은 빛입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당장 쏜살같이 물러가는 법입니다"

이것은 매우 '순진해 보이는'(naive) 어린이용 설교의 예증이지만 사실은 매우 '심오한'(profound) 역사 변혁의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인류역사의 경험은 역사의 치유는 사람들의 인위적인 '무력'(force)에 의해서도 아니고, 단순한 '개선'(innovation)에 의한 것도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치유의 유일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 곧 좋은 소식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일 수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의 이유를 이미 잃어버린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의 전반부에서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아들"(the servant-son of God)로, 후반부에서는 "사람의 종으로서의 아들"(the servant-son of Man)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종으로서 진실로 사람들을 위해 오신 분임을 증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실 때 사람들은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이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었다(sit)"(16절)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본래 이사야 9:2 에서는 그 백성들이 "어둠 가운데 행하고 있었다(걷고 있었다-walk)"고 기록합니다. 마태는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땅의 백성들이 걸어다닐 힘도 없이 이미 주저앉아 버린 무력감과 절망의 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벽의 여명입니다. 예수는  어둠이 있는 곳에 빛으로 오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가 역사의 어두움 속에 임하시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오늘 소위 IMF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인생들은 또다시 삶의 비전을 잃어버리고 깊은 좌절감의 늪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같은 역사의 어두움의 때에 그리스도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인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시작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리스도가 언제나 "올바른 때에" "올바른 장소에" "올바른 메세지를 가지고" 오신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첫째로 그는 '올바른 때'(right time)에 오십니다.

반응형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광야의 시험과 오늘의 본문 사이에는 약 1년간의 기다림의 공백기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오늘의 본문 12절에서는 "예수께서 요한의 잡히심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오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이 왕되신 예수의 사역을 예고하던 전령-요한이 감옥에 간 사건과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교량역할을 하던 요한의 사역은 바야흐로 마쳐지려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시대에 그의 미션을 감당하였습니다. 그의 사역은 위대하였고 그의 용기는 출중하였고 그의 죽음은 장엄하였습니다. 그는 진실로 "여자가 낳은 자 중 이보다 큰 사람이 없다"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증거해 온 왕되신 메시야께서 바야흐로 그 모습을 드러내실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서두르지도 않으셨고 늑장을 부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때에 오십니다. 그는 언제나 때가 찬 시각 곧 그의 카이로스(kairos)에 하나님의 시간계획을 따라 움직이십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잡힘과 비극적 죽음은 결코 우연한 비극적 해프닝은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의 선(善)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경륜의 허용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어두움이 깊어가면 언제나 하박국 선지자처럼 두가지 불평을 합니다.  첫째는 '어찌하여'(why) 이런 일이 생기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어느때까지'(how long) 이런 일이 계속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 까지니이까?"(합 1:2)

이것은 오늘 IMF 시대를 맞이하여 이 땅의 민중들이 부르짖는 불평과 얼마나 닮은 꼴인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믿어야 합니다.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갈 6:9)을 믿어야 합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습니다. 마침내 역사의 캄캄한 어두움의 정적을 깨트리고 "보라 신랑이로다"는 외침을 들을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시각 그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때가 찬 시각이 아니었습니까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셨다"(갈 4:4)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오늘의 어둠의 역사의 밤에도 정확하게 그 분의 때를 분별하여 행동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때와 기한은 그 분께 맡기고 마땅히 우리가 할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의 참회와 교정을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 우리의 순종, 우리의 섬김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올바른 때에 반드시 그 분의 섭리의 손길을 내리실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올바른 장소'(right place)에 오십니다.

예수께서 유대땅에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또다시 갈릴리로 가신 것은 단순한 환경적 요인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즉 헤롯의 핍박이나 바리새인들의 압력 때문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유대땅을 떠나신 이유는 거기서 그의 사역이 끝나신 까닭입니다.

그가 사마리아를 통과하신 이유는 거기에도 그가 찾아서 구원해야 할 반쪽의 유대인 반쪽의 이방인이었던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같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제 갈릴리에 오십니다. 그것이 그의 새로운 사역지 곧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우선순위의 땅이었던 때문입니다.

갈릴리는 '이방의 땅'으로 불리워져 왔습니다.

왜냐하면 다마스커스에서 애굽으로 가는 무역로의 통로를 이루던 도시로서 항시 이방인의 문화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았을 때 티글랏 필레셀(Tiglath-pileser)은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앗수르로 끌어갔고 대신 앗수르인들과 비유대인들을 이 갈릴리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는 국제결혼이 낯설지 않았고 유대의 전통에 대한 집착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중에서 서북쪽 갈릴리 어촌 가버나움을 선교의 중심 마을로 삼으셨습니다.

일찌기 스블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던 갈릴리, 당시 유대땅의 안목에서는 변방이었던 소외된 이곳이 예수님의 선교의 사령본부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대부분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곳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열국들을 부르시고 세계를 복음화 하시기 합당한 새로운 장소로 보였음에 틀림없었습니다.

사람의 편견이 곧 하나님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지금 이 땅은 세계의 새로운 무역전쟁의 땅, 개방된 이방문화의 땅이 될 징후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국수주의적 태도로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기회일 수 있습니다.

이 땅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이었음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는 언젠가 IMF가 이 땅에 주신 하나님의 기회였다고 말할 수가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요한 7:41)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요한 7:52) 이런 편견을 깨뜨리는 빛의 역사가 갈릴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세계의 도움을 구걸하는 이 부끄러움의 땅 - 한국에서도 메시야의 새로운 역사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 땅은 21세기의 복음의 대 사역을 위해 준비된 올바른 장소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올바른 장소에 오십니다. 그 올바른 장소는 예수를 그리고 복음을 목마르게 필요로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올바른 메세지'(right message)를 가지고 오십니다.

메시야되신 예수께서 올바른 때에 올바른 장소에 오실 때 그는 언제나 올바른 메세지를 가지고 오십니다.

그는 그 메세지를 선포하십니다. 본문 17절에서는 '전파하시었다'(kerusso)고 기록합니다. 전파는 논쟁이 아닙니다. 설득이나 토의도 아닙니다. 그것은 선포입니다. 복음의 전파는 결코 좋은 의견의 제시나 철학적 대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길에 대한 선언인 것입니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첫 번째 복음의 전파는 두 가지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회개와 천국이었습니다.

회개는 천국을 수용하고 경험하기 위한 전제로서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metanoeo)는 관점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방향의 전환을 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죄로부터의 돌이킴과 하나님에게로의 삶의 전환의 촉구였습니다.

사도행전의 복음선포에는 이 회개가 언제나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으라"(행 2:38)고 베드로는 설교했습니다.

이 선포에는 권위가 있었고 삼천명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세대에 복음이 복음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회개에 대한 불충분한 강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희망은 경제회복만이 아닙니다. 정치구조의 갱신만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회개없이 이 회복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국(Kingdom of heaven)을 외쳐야 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천국은 땅의 소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유토피아의 꿈이 만들어낸 테크노피아의 세상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늘에서 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나 존귀하고 거룩하였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하늘로 대신하였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더 나아가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에 천국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천국의 본질적 속성이 곧 의와 평안과 희락(롬 14:17)이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천국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는 곧 천국의 현존(現存)입니다. 그가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찌기 초대교부 오리겐은 천국은 곧 예수 자신의 나라(auto basileia)라고 불렀습니다.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가 곧 복음이십니다. 오직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과 새생명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변질된 복음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교회가 순전한 복음의 선포에 순전하게 순종할 때 나는 오늘 우리 역사의 어둠은 소리없이 지체없이 물러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위대한 설교가 '말틴 로이드 죤스'(Martin Lolyd Jones)가 "역사의 암흑기는 곧 설교의 암흑기였다"는 말을 저는 온몸으로 동감합니다.

저는 이 말을 설교다운 설교, 복음다운 복음이라는 말로 바꾸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 강단에 설교다운 설교, 복음다운 복음이 과연 선포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설교다운 설교, 복음다운 복음이 선포될 때 나는 이 땅의 백성들 가운데 회개가 터져나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때에 영적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진정한 영적갱신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그 무엇'(somthing we do)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somthing God does)입니다. 그것이 영적각성입니다.

그 때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이 빛 가운데서 드러난 온갖 어두움들이 지적되고 제거되고 포기될 것입니다. 그 때에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있던 자들이 일어나 빛 가운데서 걸어갈 것(walk)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벌써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는 기도가 부분적으로나마 응답되는 순간입니다. 그 때가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그 때가 사모되지 않으시나요?

그래서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회개할 때입니다. 참된 복음을 선포할 때입니다. 그리고 새벽을 기다릴 때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회개할 때 그 새벽은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주권적으로 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것은 매우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천년전 갈릴리 땅에 예수께서 임하신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지금도 우리들의 갈릴리에 그렇게 임하고자 하십니다.

아프리카 중서부 한 마을에서 성경번역을 하던 선교사가 죽었을 때 마을사람들은 그의 무덤에 자그마한 비문 하나를 세웠다고 합니다.

"당신이 올 때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삶을 던져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이유라고 믿습니다.

그는 역사의 여명이십니다. 그가 오시면 역사에 새벽이 열립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