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3장 1-10절 광야의 외침 - 최동규 목사

재영구리 2023. 2. 26.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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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3장 1-10절
설교제목 : 광야의 외침
설교자 : 최동규 목사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국’이라고 하면 좋은 것으로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천국이 어떤 사람에게는 대단히 무섭고 심각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임박한 천국의 도래를 어떤 자세로 맞이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올바른 태도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전에 늘그막까지 자식이 없었던 제사장 스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아이는 부모의 극진한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랍니다. 제사장직은 세습되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여러모로 안정된 생활환경 가운데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례 요한이 빈들에서 자랐다고 기록합니다(눅 1:80).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쓰임 받은 위대한 종들이 이처럼 광야 준비기간을 그쳤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떼를 치면서 보내야 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10년 동안 사울에게 쫓기며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출애굽의 지도자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을 받은 인물들이었지만,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광야 학교를 지나야 했습니다. 고난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하나님만 의뢰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의 선구자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쓰임 받지는 않았습니다. 안락한 보금자리를 떠나 열악한 환경인 빈들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며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쓰신다’고 말합니다.

저는 지난 시간동안 우리 가운데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될지, 어떻게 도와야 될지 막막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저 가만히 옆자리를 지켜주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위로한답시고 어설프게 몇 마디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아픔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답답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그 분들이 바로 광야의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광야의 시간은 어떤 면에서 외롭고 고독한 시간입니다. 괴롭고 절망스러워서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광야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되는 시간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원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소연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광야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이 땅의 모든 것에 대한 소망이 끊어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게 만듭니다. 참으로 의지할 것은 재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임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광야 학교를 통해서 사람들을 준비시키시고 때가 되면 쓰십니다. 광야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이 사실로 인해 위로 받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자 빈들에 있던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고(눅 3:2), 그는 유대 광야에서 자신의 사명을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임무는 백성을 준비시킴으로써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지는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첫 번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2)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의 뒤에 오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을 첫 번째 메시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은 광야로부터 울려나오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가가 말했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3).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야생벌꿀을 먹으며 지냈는데, 그 모습은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날이 이르기 직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의 날을 준비하리라 믿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요한의 출현은 대단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권세 있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요한의 선포 앞에 유대인들은 두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반응이 5-6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았으나,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며 죄악 가운데 지냈던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고, 그 후 계속해서 외세의 지배아래 살았습니다.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시간들은 암흑과도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 기간은 광야 학교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시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망각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려는 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천국, 곧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는데,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면서 먹고 사는 일에만 바빴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식함 없이 살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반응은 7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들은 죄를 자복하고 세례 받기 위해 온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상황을 그저 보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외침에 무관심하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회개하는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적어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으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9).

유대인들은 주의 날이 임하면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진노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 자기들은 승리의 날이요 기쁨의 날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기들이 심판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은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종교적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기도도 열심히 했고, 누구보다 금식도 많이 했습니다. 십일조도 꼬박 꼬박 드렸습니다. 시장에서 채소 한 단을 사도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금액을 드릴 정도였습니다. 형식을 지킴에 있어서 그들보다 더 철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에게 심각한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8-10) 그들은 종교적 형식에는 열심을 내었지만 자기 마음을 하나님 백성답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겉모습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그 마음은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광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심을 우리 마음이 감지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에 그렇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고난과 아픔을 겪으면서 그렇게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그야말로 난데없이 일상생활 중에서 갑작스럽게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중 하나를 보이게 됩니다.

첫 번째는 전인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많이 불렀으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던 것을 깨닫고, 가슴 찢어지는 아픔으로 회개합니다. 나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내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하나님 백성답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애통한 심정을 가집니다. 지성은 하나님을 문득 깨닫고, 감성은 애통한 심정을 가지고, 의지는 다시금 그 뜻대로 다시 순종하여 하나님 백성답게 바로 살려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반면, 내면의 그러한 의식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으로’ 이만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판은 불신자들에게나 임하지 교회 잘 다니고 있는 나에게는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행한 종교적인 활동 때문에 안심합니다. 자기가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참으로 기도의 대가를 만나게 되면 자신의 기도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가를 깨닫게 되는 것처럼, 아무리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했을 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죄 없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을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며 참으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요한의 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도 좀처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하는 자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더욱 심각한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속으로’ 나는 심판에서 면제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로 예비해야 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광야 기간이라 생각될 때는 특히 자기 내면을 잘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회개를 촉구하심을 느낄 때 지체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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