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2장 13-23절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하시다 - 송다니엘 목사

재영구리 2023. 2. 2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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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2장 13-23절
설교제목 :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하시다
설교자 : 송다니엘 목사님

본문: 마 2:13-23 요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우리는 지난주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아가 탄생하셨으나 정작 유대인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이 멀리서 와서 그분을 경배한 것을 보았다. 오늘 본문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유대인의 홀대를 넘어 신생아 메시아께서 죽음을 면하기 위해 피신하신 것을 보도한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기 생명의 보존을 위해 피신하신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신비한 사건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가 있다. 모든 권력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피해가시는 것과, 교회도 핍박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며, 각 신자도 이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모든 적의 저항 속에서 진행되며, 결국 모든 저항과 어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성취된다. 나의 구원도 이와 똑같은 길을 통과한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 역사의 성격을 잘 깨닫고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자.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이 본문은 헤롯이 실제로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준다. 점성가들이 자기 몰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헤롯이 알기도 전에, 즉 그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지시하신다. „애굽으로 피하라“는 지시는, 애굽이 옛날부터 자주 피난처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애굽으로 피난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또한, 헤롯이 지배하고 있을 당시에는 애굽 인과 헤롯 사이가 좋지 않았고, 거리상으로 베들레헴에서 직선거리 100킬로미터 떨어졌으므로, 애굽은 피난처로 안성맞춤이었다.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요셉은 지시를 받자마자 즉시 결심을 하고 바로 그날 밤에 애굽으로 피신했다.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갔다. 산모와 신생아를 데리고 먼 길을 걸어서 난생 가보지도 않은 애굽이라는 외국 땅으로 피난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또한 아무 대책도 없이 가야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에게 세상을 지배하실 메시아가 왜 피난을 가야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며칠 고민하여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을 때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천사의 지시를 받자마자 한 밤중에 애굽으로 떠났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사역에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요셉은 신약 전체에서 가장 귀중한 믿음과 동역의 사람의 예 중의 하나이다. 그는 말씀에 즉각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자기 아들을 망명자로서 고난을 겪게 하셨을까? 이는, 그의 아들이 진정한 우리의 구속주요 화해자가 되시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병과 고난을 겪으시고 그것을 지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사53:3 이하). 실제로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난을 모두 겪으신 분이다. 이렇게 „낮아지는“ 길에서, 세상 권력자들을 통한 박해 속에서, 세상의 갖은 구조악 속에서 저항하지 않고 이 길을 가심으로써, 이와 똑같은 길을 가야하는 교회의 모범이요 원형(原型)이 되셨다(마 16:24 이하; 고후 4:7 이하; 행 12:13 이하). 예수님의 초대의 말씀을 들어본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는데, 우리도 역시 바로 이와 같은 길을 가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한 바가 되어 부활의 권능을 누리는 자인데, 이것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같은 길을 가야만 한다. 이러한 이유로 고난을 의식적으로 피하려는 자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라고 할 수 있다. 요셉과 마리아가 얼마나 고난을 적극적으로 감당했는가를 잘 배워서 우리도 실천에 옮겨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길은 바로 예수님이 가신 길이다.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우리는 15절에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배운다. 메시아의 연약함, 즉 힘없는 갓난아이로 태어나시고, 또한 때어나자마자 도주해야 하는 운명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나오신 것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호 11:1)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신 것으로 보았다. 이 말씀은 얼핏 보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호세아 말씀은 출애굽 사건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세아 11장과 마 2:15절을 잘 연구하면 우리는 신약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 귀중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물론 호 11:1 말씀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동시에 전형적(유형학적, typological)이다. 즉, 그 당시에 성취된 것이 말세에 새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 번 성취된다. 즉,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해방이라는 유형(Muster, pattern)을 만들어 놓으시고, 이 유형을 미래에도 계속 사용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셨는데, 이러한 일은 메시아에 의해 결정적으로 또 한 번 일어났다는 것이며, 이것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사가 한 걸음 진척되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사탄의 손으로부터 구속받은 것(antitype)은, 이스라엘이 바로의 손으로부터 구원받은 것(type)과 같은 유형이다. 성경에는 이런 유형이 많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참된 아들임을 알 수 있다.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을 근거로 이스라엘은 무조건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사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요 8:44). 하나님의 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바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며, 이로써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즉, 그분은 이스라엘의 대표자시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표자시며, 그분이 대표로 출애굽을 하신 것이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사탄의 손아귀를 벗어난 출애굽을 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 방법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쫓겨다니는 메시아, 쫓겨다니고 비방당하고, 순교하는 교회의 종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 사역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현실의 모습을 보고 낙담하면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고, 우리도 가야할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려운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헤롯은 점성가들을 속이려고 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속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진척되고 있음에도 헤롯은 자신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 영적 현실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자기 성찰로 이끄시려는 경고로 이해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는 „심히 노하였다.“ 이렇게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는 자는 지혜가 없어 눈이 멀어 결국 멸망할 뿐이다.  

그는 자기에게 충성스러운 군인들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모두 살해했다. 이 살해 사건은 다른 역사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건은, 자기 가족을 많이 죽이고 무수한 정적을 살해한 헤롯의 말기 행적과, 또한 그의 성격에 꼭 들어맞는다. 헤롯은 점성가들로부터 들은 날짜를 잘 계산해서 행동에 옮겼다(7절). 그는 예수님을 꼭 죽이기 위해 기간을 앞뒤로 넉넉하게 잡았다. 그는 별이 나타났을 당시, 즉 일년 전에 예수님이 태어났을 가능성도 고려에 넣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죄 없는 많은 어린이를 죽인 사건을 볼 때에 그 잔인함에 분노를 느끼고 무력감까지도 느낀다. 그런데 이 잔인한 사건 속에서도 마태는 구속사적인 성취를 보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렘 31:15의 이 인용은 새 언약을 약속하신 것(31:31 이하)과 같은 장에 나온다. 그곳에서 새 언약의 말씀이 오기 전에 15절의 고통스러운 기간이 먼저 올 것이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을 통한 구속에는 유아 살인이라는 고통이 앞선 것이다. 사탄은 죽이고 방해하는 일을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역을 막을 수 없다. 사탄은 그리스도인의 영생을 뺏으려고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지만, 그는 이 고통을 통해 더욱 그리스도의 말씀에 뿌리를 내린다.  

„라마“는 예루살렘 동북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이것은 라헬이 묻힌 곳이며, 베들레헴 지역에 속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녀의 비석이 있었다(참조: 35:19-20; 마 23:29). 아름다운 그녀는 남편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했고, 남편에게 아들 벤야민을 낳아주다가 산고로 인해 죽게 되었다. 그래서 라헬이 묻힌 라마는 한 많고 슬픈 장소의 상징이 되었다. 이제 그곳에 사는 여인들이 억울하게 자식을 잃게 되어 라헬과 같이 슬프게 울게 되었다.  

죽은 자들을 살리러 죄인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맞이할 수 있는가? 대부분 사람은 홀대하고, 왕은 죽이려고 하고, 그분이 태어나신 곳의 영아들까지도 죽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래 악한 모습이다. 그러나 아들을 잃고 슬퍼하고 통곡하는 자들이 나중에 메시아를 만나게 될 때에 그 슬픔과 통곡이 기쁨과 환희로 바뀔 것이다. 메시아께서는 죄인에게 참 생명을 주시러 오셨기 때문이다.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헤롯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다. 모든 폭군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죽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폭군을 죽이는 것을 거부한다. 폭군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그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폭군을 통해서도 사역하시기 때문이다. 헤롯이 죽은 후에, 즉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으시고 그를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하셨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이렇게 세상의 권세는 지나간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두려워했고, 인간의 생명을 좌지우지했던 군주가 오늘은 자기가 죽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가끔 우리 앞에 산과 같이 큰 환란이 우뚝 서 있고, 이것은 이길 수도, 견딜 수도 없이 보일 때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 한 마디면 이것이 마치 허깨비처럼 모두 사라진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때에 일어난다. 요셉과 마리아는 낯설은 애굽 땅에서 살면서 믿음으로 이 때를 기다렸다.  

요셉은  „이스라엘 땅으로 왔다.“ 요셉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그분의 때에 그분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그는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들었다.“ 헤롯의 사후에 후계자 문제를 놓고 싸움이 있었다. 결국 로마는 아켈라오가 유대를, 그의 형제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와 베레아를, 그리고 또 다른 형제 빌립이 트라코니티스와 북동쪽의 땅을 차지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참조: 눅 3:1). 요셉은 여행 중에 이 결정을 들은 것 같다. 그 결과 요셉은 „거기(유다)로 가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 당시의 보도를 읽은 사람은 그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유대인은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어 아켈라오가 왕이 되지 못하도록 진정했으나 실패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 헤롯과 닮은 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잔인했으므로 약 10년 후에(기원후 6년에) 로마에 의해 폐위되어 귀양갔다.  

그런데 요셉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은 것이 매우 훌륭한 점이다. 그가 „꿈에 지시함을 받“은 다음에 비로소 „갈릴리 지방으로“ 갔다. 다시(참조: 눅 2:4) 그는 자기의 고향인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살았다. 그런데 마태는 단순히 나사렛이라고 하지 않고, „나사렛이란 동네“라고 했는데, 이  표현이 좀 특이하다. 그러나 이로써 마태는 벌써 그 이름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이제 그 의미를 해설해보자: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것은 히브리(아람)어를 아는 유대인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마태복음서는 원래 히브리어로 쓰였다). 왜냐하면 마 2:23은 사 11:1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가지“는 히브리어로 „nezer“이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단지 자음만 사용하므로 나자렛인을 표기하면 n-z-r로 표기하는데, 이것은 사 11:1의 가지이다.  

그런데 사 11:1 뿐만 아니라 이사야 53:2, 예레미아(23:5; 33:15)와 스가랴(3:8; 6:12)도 „가지“에 대해 예언했다: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렘 23:5). 이 말씀에서 가지를 나사렛인으로 바꾼다면 하나님께서 한 나사렛인을 일으키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마태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깨달았다. 마태는 이 시점에서 구약의 예언이 벌써 4번이나 이렇게 성취된 것을 보았다. 나사렛은 기원후 4년까지 유대에 속한 마을이었다. 복음서가 언급하기 전에는 그 마을이 다른 곳에서 언급된 적이 없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팔레스타인 마을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로써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에 대한 보도를 끝맺는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사셨다: 하나님과 부모에게 순종하시면서 성장하였고, 수공업자로서 생활비를 버셨다. 요단 강에서 세례 운동이 시작할 때 비로소 그분은 은둔의 삶으로부터 나오셨다. 그러므로 이제 마태는 30년을 뛰어넘어서 다음 장에서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한다.  

오늘 우리는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1장부터 보면,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는 간음녀라는 혐의를 받아야 했고, 누가복음에 따르면 마굿간에서 태어나셔서 여물통 위에 누우셨다. 그리고 태어나자 마자 급히 외국으로 피신하셔야만 했다. 또한 그가 태어난 곳의 아기들이 죽어야만 했다. 애굽에서 돌아 오실 때에도 아켈라오 왕 때문에 쉬운 길로 오시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것들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전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미리 고난의 길을 예비하셨고, 메시아는 그 길로 가신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공생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분은 고난의 길을 가셨고, 또한 십가가의 고난을 받으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와 교회를 세우시라는 명령을 주셨다. 그리고 자신의 권능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런데, 그리스도로부터 권능을 받은 제자들도 왜 예수님과 같이 고난을 당해야만 했을까?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자: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도 예수님 못지 않게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얻으신 권세는 죽음을 이긴 권세이다. 이 땅에는 죽음보다 더 큰 권세는 없다. 예수님은 부활로써 그 권세를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이 권세를 힘입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된 몸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본질상 생명에 대항해서 싸우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우리의 육신이 죽는 것이다. 고난이 없이는 육신은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면 이것은 우리 안에 생명이 있다는 표시이다.  

예수님의 고난에 찬 삶은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에게 그분의 제자로서의 가야 할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길을 가야 한다. 영생의 길은 이 길밖에는 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끝까지 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길을 전부 예비하시고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을 가기 때문에 분명히 승리한다. 사탄은 끝까지 방해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승리하신다. 우리는 이 전능하신 하나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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