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5절 라합 - 윤석준 목사
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5절
설교제목 : 믿음의 여인 라합
설교자 : 윤석준 목사님
본 설교는 캐나다 개혁교회 Van Popta 목사님이 쥬빌리 개혁교회에서 설교했던 것을 유은교회에서 낭독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회중 여러분!
마태복음 1장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안에 기술된 두 번째 여인은 라합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창녀였습니다. 창녀, 곧 매춘부를 가계도 안에 갖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든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복음전도자 마태가 주 예수님의 계보에 라합을 기술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가나안 매춘부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 속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지위를 주셨습니다. 이는 라합이 행한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주 하나님께서 라합을 통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에 신앙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라합을 사용하셔서 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합을 사용하셔서 가나안 땅의 문을 여심으로서 그의 택한 백성들이 들어가 그것을 소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라합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오는 길을 여는 문을 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문을 여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에 나쁜 일이 생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이 잘 해결되도록 문을 여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나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문을 여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곳으로부터 통과하도록 이끄시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선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을 여시는 분이시다”
오늘 말씀의 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라합의 마음의 문을 여시고 그녀에게 믿음을 주신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라합의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 그 땅의 문을 여신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공동체 속으로 라합을 부르심으로써 그리스도를 향한 문을 여신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라합의 마음의 문을 여시고 그녀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땅의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그 종 된 삶에서 벗어나게 하셨을 때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그 땅입니다. 이제 그들은 바로 그 땅의 입구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영도 하에 그들은 40년 전에 그 땅의 입구에 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을 그 땅에 보냈습니다-한 지파에 한명씩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아실 것이므로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을 탐지하는데 40일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10명의 정탐꾼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살고 있는 강대한 나라들로부터 그 땅을 차지할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그들 중 두 사람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열 명의, 즉 다수의 진술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죽는 편이 칼에 죽는 것보다 낫지 아니하냐. 오! 우리가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없음에 진노하십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도록 선고를 받았습니다. 열두 정탐꾼이 그 땅에서 보낸 날의 각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한 시간입니다(민13, 14장).
이제 40년이 지나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가 그 땅의 입구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싯딤’이라 불리는 지역에 장막을 쳤습니다. 싯딤은 요단강 동편, 사해의 북쪽 끝에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여리고와 멀지 않았습니다. 여리고는 요단강을 건너면 바로 만나게 되는 가나안 땅의 첫 번째 도시입니다.
여리고는 그 땅에 발판을 놓기 위하여 정복되어야만 했습니다. 전술적으로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곳은 큰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약 만 평 정도 되는 면적의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여리고는 강력한 도시요, 요새였습니다. 여리고 주변으로는 매우 두꺼운 성벽이 둘러 쳐 있었습니다. 이 벽은 원형으로 지어진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죽고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에 보냅니다. 그는 말합니다. “가서 그 땅, 특별히 여리고를 정탐하라.”
정탐꾼들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향해 가서, ‘라합’이라고 불리는 창녀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라합은 작은 여관-여행자들이 밤을 보내는 장소-을 운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장소는 정탐을 위한 최적의 장소이곤 합니다. 그들은 단지 두 명의 여행객인 것처럼 위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들은 가서 왕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라합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분명 그들은 그 땅을 탐지하러 온 자들입니다! 왕은 정탐꾼들을 잡기 위해 라합의 집에 병사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이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짐작했고, 두 사람을 그녀의 집 지붕에, 그녀가 말리기 위해 지붕에 넌 아마(亞麻) 더미 아래에 숨겼습니다. 라합은 병사들에게 말합니다. “맞아요. 여기에 두 사람이 왔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오래 전에 이미 떠났습니다. 그들을 잡으려면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에요.” 왕의 병사들은 두 정탐꾼을 잡기 위해 모두 요단강을 향해 갔습니다.
왜 라합이 이렇게 행했을까요? 왜 그녀는 병사들에게 그 사람들을 넘기지 않았을까요? 왜 그녀는 “당신들이 찾고 있는 그 사람들은 위층, 내 집 지붕에 숨어 있어요”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그녀는 그 왕에게 보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스파이들을 숨기고 자신의 국민들을 배신한 행위는 가장 비열한 범죄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그러한 반역은 가장 극심한 처벌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침략국이 우리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어떤 사람이 우리의 약점을 탐지하러 온 스파이를 돕거나 선동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거의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배신자 유다라고, 이완용 같은 인간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법정 최고형으로 그를 엄하게 다루도록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라합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무엇이 그녀를 움직였습니까?
단 한가지의 답변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로,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 이방인 창녀의 마음의 문을 여시고 그녀에게 믿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녀는 주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두 증인들-두 정탐꾼- 앞에서 경건한 고백을 합니다(9절).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라합은 4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신 일은 무려 40년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의 최고 세력이었던 바로와 그의 군사들을 홍해에서 익사케 하신 것은 무려 4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강력한 두 왕 시혼과 옥을 전투에서 패퇴시킨 것도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여리고와 그 모든 땅의 백성들은 그러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신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이 민족에 대해 들었습니다. 여행자들이 그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여리고를 통과하여 가던 상인들이 아마도 라합의 집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깥 세상에서 일어난 소식들을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강한 신과 함께 있는 이 강력한 나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나라 이스라엘은 요단강 기슭에 도달해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새로운 중요성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라합은 여호수아 2:11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우리가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여리고의 백성들은 겨우 20킬로미터 밖, 요단강만 건너면 이스라엘이 오게 된다는 사실에 죽을만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그들의 코앞에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에 관한 있음직한 한 반응입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을 알게 된 자들이 반응하는 한 가지 방식이기도 합니다. 도시의 문을 닫고 걸어 잠그라! 이 위험천만한 신 앞에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문화를 방어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
그것은 여리고 사람들의 반응의 방법입니다. 라합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녀는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그녀는 그 하나님, 이스라엘의 신이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신 줄을 깨달았습니다(2:11). 그는 한 지역의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은 자신들의 신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신들은 지역신입니다 - 어떤 나라나 민족의 신들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참 신이시며, 하늘과 땅의, 온 우주의 하나님인줄을 깨달았습니다.
라합은 선택을 했습니다. 여리고의 모든 주민들도 선택을 했습니다. 라합이나 여리고 주민들이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을 위하거나, 그에게 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들 모두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신 위대한 구속의 사역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의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보호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라합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릇된 종교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참 신이신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 교회와 연합했습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해야만 하는 영원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세상을 섬길 것인가?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것인가? 내 삶 바깥에 그리스도를 둔 채로 세상이, 오늘날의 문화가 내게 원하는 것을 할 것인가? 나는 나의 죄악된 욕망들이 내게 하기를 원하는 대로 살 것인가?
전자를 선택한다면 그분의 의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후자를 택한다면, 나의 의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에 대해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역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라합보다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행해진 가장 위대한 구원 사역, 곧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자기 희생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라합의 마음의 문을 여셨고, 그녀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계십니다. 라합에게 보내셨던 것과 동일한 성령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여리고의 백성들이 행했던 것처럼 문을 닫지 마십시오. 절망에 가득 차 문을 걸어잠그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이기심과 죄악된 욕망을 지키려는 시도는 헛된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무익한 수고입니다. 여리고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성문이 그렇게 닫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어오시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벽을 무너져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도시를 파괴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주장하는 자들은 동일한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멸망을 만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십시오. 믿음으로 그것을 받으십시오. 역동적인 믿음으로 그것을 받으십시오. 순종의 선한 역사를 만들어 내는 그 믿음으로 말입니다.
둘째, 이제 하나님께서는 라합의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 그 땅의 문을 여십니다
히브리서 11:31은 그녀가 행한 일로 인해 라합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믿음의 예로 기술된 하나님의 구약 백성들의 긴 리스트를 만납니다. 모든 시대의 교회들을 둘러싼 그 구름과 같은 증인들은 교회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두 명의 여자들을 쓰고 있습니다: 사라와 라합. 라합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예로 기술됩니다.
라합은 다시 야고보서 2:25에도 나와 있습니다.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은 하나님의 사자들인 두 정탐꾼들을 향해 행한 일로 인해 의로운 여자가 되었음이 입증됩니다. 그녀의 선행은 그녀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두 본문(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은 라합이 하나님 안에 있는 참 믿음을 소유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강하게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열매를 낸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라합의 이 믿음을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그 땅의 문을 여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라합을 사용하셨어야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기뻐하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녀는 정탐꾼들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들을 숨겼습니다. 그녀는 그 도시의 경비대를 보냄으로써 헛된 수고를 하게(wild goose chase) 하였습니다. 그녀는 정탐군들에게 좋은 충고도 주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산에 가서 숨으라고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정탐꾼들에게 여호수아에게 돌아가기 전 3일 동안 몸을 숨기라고 조언했습니다.
이 살아있는 믿음, 이 신실한 라합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정탐꾼들을 살리셔서 격려의 소식을 가지고 그의 백성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정탐꾼들은 일치된 보고를 합니다 - 40년 전의 열 두 명들과는 전혀 다르게 말입니다. 정탐꾼들은 그 땅이 자기들의 것이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여호수아에게 돌아갔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 땅의 처음 출입구였던 여리고에서 아무런 저항도 만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말입니다. 그들은 라합이 그들에게 한 말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2장의 끝에서 우리는 읽습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여호수아 2장에서 우리는 “그 땅”이라는 표현을 일곱 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6장의 몇 절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주고 계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바로 그 땅입니다. 이 땅은 그들이 애굽에서 경험했던 압제로부터 그들을 자유케 해 줄 땅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그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땅입니다. 이 땅은 안식의 땅입니다. 히브리서 4장은 여호수아가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종됨으로부터의 안식, 광야에서의 40년 동안의 방랑으로부터의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바로 이 약속의 땅을 주시기 위하여 라합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데에 여호수아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둘 모두는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사역하는 바 나름의 위치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교회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라합을 사용하셨고, 여호수아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히브리서 4장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더 나은 안식을 기다리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더 나은 여호수아는 다윗의 아들, 라합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 땅을 가집니다. 이 땅은 우리가 압제로부터, 모든 비참과 슬픔으로부터 안식하게 될 땅입니다. 이 땅은 영원히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길 땅입니다. 라합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신 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땅의 문을 여십니다. 아주 넓게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신앙의 공동체 속으로 라합을 부르심으로써 그리스도를 향한 문을 여십니다.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을 떠나기 전, 그녀는 그들과 맹세를 합니다.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약속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창에 붉은 줄을 매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집은 성벽 바로 안에 지어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정탐꾼들을 창문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창문에 붉은 줄을 매고 그 창문으로 내려가게 한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그녀에게 말합니다. “창문에 이 줄을 매고 너의 가족들을 이 집으로 모이게 하라. 그러면 너희 모두가 안전하리라”
라합의 붉은 줄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붉은 색은 에로틱한 함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한글성경에는 ‘붉은’ 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은 ‘스칼렛[진홍, 다홍]’이다. 이 글에서는 성경을 따라 그냥 ‘붉은’으로 번역하였으므로 성적인 연상이 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역주를 단다-역자주). 예를 들어 아가서 4:3에서 신랑은 그의 신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입술은 홍색실 같고...” 예레미야 4:30에서 하나님께서는 매춘부가 되어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는 자기 백성들에게 “붉은[스칼렛]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미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다말의 이야기에 보면, 산파가 다말의 쌍둥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둘 중 하나의 손가락에 붉은[스칼렛] 줄을 매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다말은 창녀인 척 하는 것을 통해 그들을 얻었습니다. 이사야 1:21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창기가 되었다고 고소하십니다. 그런데 이 바로 직전인 18절에 그들의 죄가 주홍[스칼렛]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붉은 줄이 매춘부의 표식이었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매춘부는 도시의 “붉은 줄(red rope)” 구역에서 일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히브리어 단어 ‘줄(rope)’이 희망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어로는 정확하게 똑같은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라합의 줄이 그녀의 희망이 되었다는 점을 보게 됩니다. 그녀의 붉은 줄은 구원의 소망으로 이끌었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붉은 피로 인해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메신저들이 라합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성 주위를 돌아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지게 하셨을 때,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파멸로부터 건지셨습니다. 전체 성은 하나님의 저주 하에 있었지만 라합은 그 저주로부터 구출되었습니다. 그녀는 정결규례를 수행하기 위하여 며칠간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장막 바깥에서 거해야만 했습니다만, 그 일이 마쳐졌을때, 라합은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연합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함께 모여져 성도의 교제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라합은 유다지파의 ‘살몬’이라고 불리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계속해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었고,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성탄을 향한-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향한- 문을 여시는 데 계속해서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계보는 살몬과 라합이 보아스(룻의 남편)의 부모였다고 말씀합니다. 이 계보는 다소 선택적입니다. 모든 세대가 다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마태는 많은 세대에서 여러 계보들을 뛰어 넘었습니다. 여기에 그 예가 있습니다. 살몬과 라합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던 때의 기간에 살았습니다. 보아스와 그의 아내 룻은 꽤 오랜 이후의 사람들입니다. 라합과 보아스의 사이에는 여러 세대가 생략되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전도자 마태가 이 의도적인 계보의 생략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나님께서 라합을 장차 구주의 탄생을 가져오게 하는 데 사용하셨다는 점입니다. 라합으로부터 보아스가 오게 됩니다. 보아스로부터 이새와 다윗왕의 가문이 오게 됩니다. 다윗왕의 왕가로부터 구주께서 오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창기 라합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그의 백성들의 진홍빛 죄를 위하여 고난당하기 위하여 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역시 그의 어머니 라합처럼 진 밖으로 나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분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지셨으므로 그분은 그들과 함께 진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고통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동체를 창조하셨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이 공동체는 그와 함께 모아졌고,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또한 그 공동체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리워집니다.
여러분은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공동체의 살아있는 구성원들입니까? 열린 마음으로 복음에 열려 있는 구성원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에 열려 있는 구성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문들을 여시는 신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여시고, 우리의 마음 속에 믿음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하여 영원한 안식의 땅을 향한 문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모여지고 있는 것을 통해 영원한 쉼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