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18-25절 죄인을 구하려고 오신 예수님 - 김영하 목사
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18-25절
설교제목 : 죄인을 구하려고 오신 예수님
설교자 : 김영하 목사님
서론 [본문 : 사 7:10-14, 롬 1:1-7, 마 1:18-25]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 면접시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면접관이 얼굴 긴 응시자를 바라보며 이러한 질문을 던졌답니다.
“거기 얼굴이 필요 이상으로 긴 친구, 자네는 머저리와 바보가 어떻게 다른지 아는가?”
면접관은 이 청년이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그 청년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럼요. 결례되는 질문을 하는 쪽이 머저리고, 그런 말에 얼굴 붉히며 대답하는 쪽이 바보입니다.”
이 청년의 지혜로움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례되는 질문을 하는 면접관에게 곤란함을 주는 것은 물론, 자신이 그러한 질문에 얼굴 붉히며 대답하는 바보는 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으니까요.
사실 예의 없는 어떤 사람의 행동에 대한 불쾌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나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얼굴을 붉히는 것은 물론 마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득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잘못을 했고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 예의 없는 사람인데, 부정적인 생각들로 힘들어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된다는 것. 이런 상태가 결국 바보가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떠한 상태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즉, 부정적인 마음으로 힘들어지는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늘 긍정적인 마음을 간직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긍정적인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은 돌발적인 자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음성을 듣는데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환경과 자신의 감각적인 판단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한 부분을 담당하여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아기 예수님을 잘 준비하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났지만 그 모든 사람들은 남녀의 성적관계를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인 관계가 아닌 특별한 탄생을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나심을 이러하니라 라고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우리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남자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은 낳고 하면서 남자들의 이름이 계속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여인이 낳았는데 남자가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 씨를 줍니다. 그러면 여자는 그 씨를 10개월간 임신한 후 세상에 내어놓습니다. 이것은 어떤 밭에 콩을 심으면 콩밭이요 옥수수를 심으면 옥수수 밭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태어나면 아버지의 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는 남자들이 낳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본문은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을 하였고 성적관계를 가지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제도는 약혼 정혼 결혼의 단계를 거치는 데 정혼하면 결혼과 똑같은 법적 책임을 지게 됩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같이 살지는 않지만 정혼을 하였으니 부부의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리아가 다른 사람과 성적관계를 맺어 임신하였다면 그리고 요셉이 이를 공적으로 드러내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이 따릅니다.
요셉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급한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성령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예수라 하라 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요셉의 처지를 생각해 봅니다. 남자나 여자나 얼마나 결혼이 중요합니까? 결혼의 잘 잘못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자는 특히 사랑하는 여인과 첫날밤을 보내며 평생 같이 지낼 것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다려집니다. 자기가 원하는 여자를 얻으면 온 천하를 얻는 것 같은 기분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을 하였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대단한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조용히 끊고자하면서 깊이 생각을 하였습니다. 상대의 처지를 생각하였습니다. 필연코 무슨일이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 바른 사람, 믿을 만한 사람, 죄가 없는 사람 이러한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꿈으로 현몽을 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알려 줍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꿈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민감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 드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 사건의 한 몫을 잘 담당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예수님의 소년시절이후에는 성경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특히 유대는 남자 중심사회인데 요셉이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가 사명이 끝이 나서 일찍 죽었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우리는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 구원자 예수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말은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들은 예언자, 제사장,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직책을 모두 수행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오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양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죄 용서를 하나님께 받아내는 직무를 수행하는 직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왕은 모든 백성들의 생명권 재산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서 우리의 생명과 소유권을 지배하시도록 왕권을 예수님께 물려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제사장, 왕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들을 메시아라고 히브리어로 말하고 헬라말로는 그리스도입니다.
당시의 세계적인 상황을 보면 정치적으로 로마가 전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헬라 문명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으면서 온갖 어려움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세금을 얼마나 지독하게 받아 가는지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거리에는 로마 군인들이 활보를 하면서 유대 백성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들은 대단히 자존심이 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민족은 다윗처럼 성군이 나와서 정치적으로 대국을 건설하여 로마를 없애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당시로서 천 년 전 그 옛날에 다윗이 유럽과 아시아를 지배하였던 향수에 젖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강하였으면 하는 꿈도 꾸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인도자가 나와서 자기들을 끌어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목말라 메시아를 기다리는데 마침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공생애를 시작한 것입니다.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어주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일인분으로 5천명을 먹이고 물위를 걷고 죽은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아 즉 로마의 식민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경제적 메시아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시는 것은 죄에서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모든 사람들은 죄 때문에 고민하고 죄 때문에 자신의 삶을 자포자기 합니다. 이렇게 죄 지은 인간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 하면서 포기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인간의 아픔을 아시고 이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당신이 직접 십자가에 죽으시어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인들 왜 자기 민족의 아픔을 보고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들은 일시적입니다.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 이었습니다.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죄 값을 누군가 치러주어야 합니다. 죄 있은 상태에서 아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치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아무리 좋은 조건에 살아도 아무리 쾌락을 누려도 감옥을 나오기 전까지는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죄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인간은 정치적인 압박이 문제가 아닙니다. 밥을 굶고 먹는 문제가 아닙니다. 죄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형벌에서 구속함을 얻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야 잠깐이지만 영원한 형벌을 받고 영원히 지옥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이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소년이 학교에 지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소년에게 지각 사유를 물었지요. 그랬더니 소년은 학교에 오는 도중 어떤 아저씨가 동전을 떨어뜨려서 그걸 함께 찾느라고 늦었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물론 동전을 같이 찾아드리는 일도 좋지만, 학교에 오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아저씨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지각하지 않게 와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그럴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 이유를 물었지요.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 동전을 밟고 서 있어서 빨리 학교에 올 수 없었어요.”
소년은 동전을 떨어뜨린 아저씨가 찾기를 포기하고 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야 자기 발밑에 있는 동전을 주워서 학교에 올 수 있으니까요. 이때 아이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한쪽 발로는 동전을 밟고 서서 다른 발로 빙빙 돌면서 동전 찾는 시늉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자세도 불편했겠지만, 마음도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불편한 몸과 마음을 간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즉, 이 소년처럼 무언가를 밟은 채 한쪽 발로만 움직이면서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정치인들은 떳떳하지 못한 정치자금이라는 동전을 밟고 서 있고, 부패 관리들은 뇌물이라는 동전을 밟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술이라는 동전, 쾌락이라는 동전, 허영이라는 동전 거짓이라는 동전, 미움이라는 동전, 시기 질투라는 동전 등을 밟고 있으면서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꽉 움켜잡으려는 것, 이것 없이는 안 된다고 생각을 갖게 하는 욕심들이 나를 불편하게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더 큰 행복을 줄터이니 아니 동전이 아닌 더 큰 지폐를 줄터이니 발을 떼라고 합니다. 동전보다는 학교공부가 훨씬 중요하다 동전보다 더 큰 돈을 벌수 있는 방법이 학교 공부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도 동전을 포기 하지 않고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동전을 밟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 동전은 나를 파멸로 끌고 가는 지뢰라고 생각을 해 보시면 아찔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지뢰밭입니다. 밟으면 터져서 죽는 지뢰 말입니다. 술, 마약, 쾌락, 도박 모두가 지뢰입니다. 처음부터 밟지를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에서 나오려면 자기 죽는 체험을 하여야 합니다. 이 소년처럼 발을 떼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이러한 길에 있지 않음을 감사하여야 합니다.
2. 민족의 살길은 그리스도입니다.
이북은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구걸하러 다닙니다. 깡패처럼 핵이라는 칼을 가지고 거대 미국과 남한을 향하여 자기들을 인정해 달라고 땡깡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리스도가 없는 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이루겠다던 공산주의의 말로를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밥만 먹여주면 왜 우리가 탈북을 하였겠느냐 합니다.
한편 남한은 최근에 갑자기 세계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왕정을 수 천 년 간 해온 나라가 이렇게 빨리 민주주의로 발전한 나라는 지구촌에서 한국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눈부신 발전의 모델입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벤치마케팅(venture marketing)을 합니다.
스포츠도 보십시오. 내년 월드컵도 200개가 넘는 나라들 중에서 32팀을 뽑는 데 유독 한국만 두 팀입니다. 인구가 15억이 넘는 중국이나 10억이 넘는 인도는 32강에 들어오지도 못하였습니다. 미국의 아니 세계의 골프계를 제패하고 있는 한국 낭자들 피겨스케이트의 김연아 축구의 종가 영국 premier legue에서 뛰는 이영표 설규현 이청용 박지성 등 세계가 알아주는 선수들이 즐비합니다. 빙상경기의 short track은 지난 20년 동안 세계를 제패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조선공업, 세계최강의 IT 강국 5대 자동차 생산국 등 자랑거리를 나열하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민족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가난해서 나오는 신음소리가 아닙니다. 도덕이 무너지고 양심이 마비되었기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명희 목사가 지은 절망촌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이들이 술 담배 마약 매음 포주 싸움 살인 온갖 사단이 가지고 있는 상품들은 다 경험합니다. 여기서 죽음을 무릅쓰고 목회하는 그 목사님은 하나님이 특별히 쓰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도 예수를 알면 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죄의 문제 때문에 즉 하나님 없이 살기에 소망이 없이 짐승처럼 그날그날 살아갑니다. 돈 있으면 종일 술 마시고 화투치고 싸우고 돈이 없으면 벌러 나갑니다. 여자들은 쉽게 돈을 벌기 위해서 몸을 팝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법자로 살다가 단명하게 가는 그들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라는 구원주가 없어서 어두움 가운데서 자신들이 죽음을 자초하면서 사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를 만나면 놀랍게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예수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이 민족을 위해서 하는 일은 구제하는 일, 자선 베푸는 일, 사회사업 하는 일,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 등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운 공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 양심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양심이 파괴되면 갈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원이 바닥이 났다. 경제가 나쁘다. 교육개혁이 필요하다. 수출이 부진하다. 야단이지만 진짜로 부족한 것은 양심이 바닥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없을 때 가난한 때는 모두 순수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면 더 욕심을 부립니다. 남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지 않습니다. 교만합니다. 자신만 잘 살려 합니다. 이렇게 양심이 마비되어가고 있으니 이 민족의 앞길이 걱정스럽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 어느 변호사는 19억 짜리 아파트 살고 해외여행은 14번 정도 하고 온 사람인데 소득은 없는 것처럼 세금보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빌라가 12채가 있고 자신은 25억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해외여행은 온 가족이 30여 차례 다녀왔는데 소득세는 거의 전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세청에서 세금을 물리려고 온갖 지혜를 짜낸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월급쟁이들은 유리상자 같아서 모든 세금을 할 수 없이 잘 내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가 지탱되어 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세금을 강탈당한다고 한숨을 쉴 것이 아니라 나는 애국을 잘 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내가 세금을 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자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것은 마비된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 민족의 양심을 살리는 데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일조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문제는 달라가 없거나 지식이 없거나 자원이 없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원이 없으면 빌려오면 됩니다. 지식이 부족하면 석학들을 모셔오면 됩니다. 달러가 부족하면 차관을 도입하면 됩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민족의 양심입니다. 이 무디어진 양심은 차관도 안 되고 빌려 올 수도 없습니다. 도산나면 끝입니다. 이북의 지도자들의 양심이 도산 난 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남한도 정치 경제 문제보다는 이 양심의 도산 나서 파산할까봐 걱정을 하여야 합니다.
딤전 1: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양심을 버리고 믿음을 파산하면 갈 곳이 지옥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개인과 사회는 소망이 없고 혼돈이요 무질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빵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셨습니다. 정치 경제 문제 예수님 없이도 됩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안계시면 모든 일이 바로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인간이 하는 정치 경제는 믿을 수도 없고 장기간 버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죄로 물들어 있기에 모든 만물들도 탄식을 합니다. 죄를 없앨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8:20-22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3. 내가 죽었음을 깨닫는 것이 올바른 성탄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시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죄 값을 치루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데 이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죽어야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죄가 없으시니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을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가 치루어야 할 죄 값을 다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 값을 치루기에 합당하고 하나님은 만족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죄와 영원한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진 사람은 이제는 자기가 살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나도 죽었고 예수님이 살아날 때 나도 살아났다는 것입니다(갈 2:20). 이제는 내가 내 주인도 아니요 내 삶의 왕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우리도 살기 위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았기에 인류 역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기에 로마는 그들의 역사를 말할 때 시저의 시대를 마감하고 그들이 죽였던 예수의 시대로 역사를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Anno Domini (AD--주님의 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주님의 해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죄인으로 태어나서 내가 왕이요 내가 주인이었던 시대를 마감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죽어야 그리스도가 됩니다.
큰 교회를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성공하고 안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내가 죽어야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진정한 큰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 들어야 합니다.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제사장으로서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참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왕으로서 우리의 삶을 예수님이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진정한 질서가 잡힙니다. 이렇게 깨닫는 것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만 너희 마음속에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오는 세상에 천국이 있다는 것이 확실할 때 이 마음에 확실한 천국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내세는 불안한데 현재 자신의 가지고 있는 것으로 행복하다면 이것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천국은 영원한 천국으로 연결이 된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을 때 성탄의 의미가 확실한 것입니다.
각자의 마음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왕으로 군림할 때만이 확실한 축복의 성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나의 힘으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이뤄놓은 것을 받아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양심대로 살면서 다른 사람의 양심을 깨웁니다. 잠자던 영혼이 깨어나서 주님의 이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신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성탄의 의미가 온 세상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새로 가집니다.
마1장 18-25 죄인을 구하려고 오신 예수님 -김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