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장 18-25절 예수님의 탄생 - 송다니엘 목사

재영구리 2023. 2. 24.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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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18-25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탄생
설교자 : 송다니엘 목사님


본문: 마 1:18-25 요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지난 주에 우리는 마태복음 강해를 시작했다. 우리가 새롭게 배운 것은, 마태가 바로 1장1절로써 구약을 연결해서 신약 성경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구약의 가장 큰 주제는, 창 3:15의 약속에 따라 메시아가 오셔서 아담이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아주신다는 것이다. 구약은 이 과정을 기술한 책이다. 그런데 바로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마태는 예수님의 역사를 자세히 기술함으로써 어떻게 이 약속이 성취되었는지를 나타내려고 한다.

구약은 이렇게 구속사(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구속사는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되어 다윗에 이르러 하나의 정점에 이른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한 자손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 분이 또한 다윗 왕의 직계 후손으로서 앞으로 영원히 왕이 되실 분이시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 인류는 그들을 다스리실 영원한 왕을 기다리게 된다. 마태는 예수께서 이 약속을 성취한 영원한 왕이심을 깨닫고, 그분이 어떻게 그 나라를 실현하셨는지를 기록하려고 한다. 

오늘 본문은 그분이 탄생하신 내력을 설명한다. 그분의 출생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생각하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이한 방법이었다. 이것은 바로 동정녀 탄생이다. 오늘 우리는 이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이 구절을 읽는 유대인은 대단히 큰 거침 돌을 극복해야 한다. 그가 설령 그리스도인이 되었을지라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유대인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면 믿지도 않고 기록하지도 않는다. 남자와 관계하지 않은 여자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임신했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뿐 아니라, 신화적인 생각을 하는 고대 사람과는 달리 오랫동안 현실을 바탕으로 생각하도록 길러진 유대인에게는(고전 1:22)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혼“이라는 말은 의미상으로 „약혼“보다는 더 좋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약혼이라는 말은 당시의 정혼만큼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혼이라는 말은, 유대 법으로는 결혼계약서를 체결했다는 의미이다. 단지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면 결혼이 완성된다(참조: 20:24). 그러므로 요셉은 벌써 „그녀의 남편“이라고 했다. 당시에 유대 처녀는 14살에 결혼했는데, 마리아도 당시 그 정도의 나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 요셉이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기 전에 벌써 임신한 것이다. 그가 마리아와 동침한 일이 없음에도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녀는 „성령님에 의해서“임신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태는 이에 대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마리아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떠한 생각과 감정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다. 추측건대, 그녀는 제사장 가문인 레위족속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눅 1:36에 따르면, 제사장 아내인 엘리사벳이 그녀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다말과 같이 음란한 행동을 한 것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참조: 창 38:24)! 제사장의 딸이 더구나 정혼까지 했는데 임신했다! 신 20:20-21에 따르면, 처녀가 아닌 상태에서 결혼한 자매는 부정한 행위의 사실이 적발되면, 그녀는 돌에 맞아 죽게 된다. 그리고 레 21:9에 따르면, 제사장의 딸은 허락되지 않은 성관계를 했을 경우에는 화형에 처해야 했다. 이러한 엄격한 율법을 잘 아는 마리아는 얼마나 큰 부담을 느꼈을까? 그녀는 공개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비밀 속에서 살아야 했다. 심술궂은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요셉이 얼마나 실망할까? 이것 때문에 가정이 깨어지지는 않을까? 마태는 예수님 이야기를 커다란 긴장과 함께 설명하기 시작한다.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태는 이제 요셉에 조명을 맞춘다.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요셉이 결혼 계약서에 서명했으므로 그는 마리아의 남편이다. 마태는 그를 „의로운 자“라고 칭함과 동시에, 의로운 자에게는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 말씀과 삶이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즉, 그는 마리아를 „수치에 드러나지 않으려고“ 했다. 설사 마리아가 돌로 사형을 당하지 않을지라도 – 당시 간음은 사형에 해당했다(요 8:3 이하; 레 20:10) – 사람에게 정죄당해 일생 낙인 찍힌 채로 살아야 했다.  

의로운 자란 하나님의 뜻(계명)에 따른 삶을 의미한다. 요셉은 „이유를 밝히지 않고“(드러내게 아니하고) 끊고자 했다. 끊는다는 말은 신 24:1 이하에 따른 이혼장을 통한 이혼이다. 아무튼 요셉은 자기가 먼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혀서 그녀에게 큰 해를 끼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마리아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은 상당히 놀랍다. 아내에게 속임당한 남편이 아내를 보호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요셉에게 붙여준 칭호인 의인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의롭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재판관의 의로움과는 다르다. 재판관은 죄를 지은 만큼 벌을 주어야 의롭다. 이유 없이 벌을 감해주는 재판관은 의롭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당시 사회에서 간음이라는 중벌은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정의로운 사회가 유지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의로움은 용서가 포함되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마틴 루터가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하나님 스스로가 희생양이 되어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의로움은 사랑과 용서, 하나님의 희생을 포함한다. 그런데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요셉은 이 사실을 어떻게 깨달았을까?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있던 하나님의 율법에 바로 이 복음이 들어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엄격함과 동시에 자비하심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한 죄사함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분명히 제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두려워하고 율법대로 사는 요셉이 마리아를 용서한 것은 율법의 정신을 잘 깨달고 그것을 실천한 것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깊은 죄성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를 의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용서의 경계선은 있다. 간음한 아내를 처벌하지는 않을지라도 이혼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렇게 요셉이 고민하고 있을 때 그에게 주의 천사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천사는 그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부른다. 이 말을 통해 요셉에게 그의 가문에 주어진 약속을 기억시키며, 이 약속이 이제 성취된 것임을 암시한다(삼하 7:12f; 사 9:5f; 11:1 이하; 55:3; 렘 23:5; 33:15 이하).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다윗에게 주신 메시아 약속이 거의 1000년이 지난 시점에 바로 요셉에게 성취된다는 것이다! 보통 이스라엘 사람 이상으로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던 요셉은 얼마나 놀라고 또한 흥분했을까? 그는 왕족의 장자로서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 드디어 자기 아들이 영원한 왕이 된다는 것이다! 드디어 자기 가문이 살아나고 이스라엘의 영광은 실현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요셉은 먼저 갑작스러운 천사의 나타남에 두려워한 것 같다. 그러므로 그 천사는 먼저 „두려워 말라“라는 말로 위로의 말을 한다. 그리고 요셉에게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라고 지시를 한다. 그녀가 임신한 것은 그녀의 과오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된 것“이다.  

여기에서도 성령님께서 어떻게 마리아를 잉태하게 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요셉은 이 사실을 단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는 오늘날에도 대부분 사람들이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적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무에서 창조하셨다는(롬 4:17) 사실을 부인해야 하며, 결국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해야 한다. 창 1-2장의 창조의 기적은 하나님 말씀인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똑같은 기적이다. 우리가 창조를 믿는다면, 동정녀 탄생을 믿어야 하고, 후자를 믿는다면 전자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이제 요셉에게 하나의 표적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그 표적을 통해 그에게 진짜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고 마리아가 진짜 성령님을 통해 임신했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리아가 처녀로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사 7:14가 말하는 표적이며, 이것이 지금 마리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결정하셨다. 요셉이 아기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가 당시의 법에 따라 아기가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창 21:3; 사 8:11 이하; 호 1:4,6,9). 그 천사는 벌써 예수님의 임무를 설명해준다: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다.“ 우리는 이것을 당시의 메시아 기대라는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모든 유대인의 당파는, 메시아가 로마인을 몰아내고, 불신자를 벌하시고, 예루살렘을 영광스럽게 만드시는 것을 기대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이다(행 1:6). 그런데 천사의 말에 따르면, 예수님의 임무는 이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음의 구절과 연관시켰다: 시 130:8; 사 53:1 이하; 렘 31:33 이하; 겔 34-36).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시는 일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부활 이후에, 그리고 재림 이후에 예수님은 비로소 권력의 문제를(악한 자/ 불신자 처벌) 해결하실 것이다.  

이것으로써 즉각적으로 일반적인 유대인의 메시아 기대와 충돌이 발생했다. „그의 백성“은 누구인가? 먼저는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백성“을 „나의 백성이 아닌“ 것, 즉 모든 이방인으로 확대 적용되었다(마 28:18 이하; 롬 9:24 이하;계 7).  

이러한 기대의 충돌은 우리가 항상 겪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누구인가? 메시아는 나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독일에는 수상이나 중요한 정부 요직의 인물이 취임할 때 국회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So wahr mir Gott helfe“)라고 선서한다. 그런데 1998년에 쉬뢰더 수상이 처음으로 이 선서를 거부했다. 그와 함께 거의 반수가 되는 각료들이 거부했다. 나중에 기자가 그 이유를 묻자, „하나님은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도와주시는 분으로 생각한다. 쉬뢰더 수상은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하나님관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보편적인 유대인들의 생각도 그렇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네가 정녕 죽으리라“라는 창 2:17 말씀에 따라 인간은 분명히 죽었다. 죽음이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으며, 죽어서는 완전히 분리되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 영원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지라도, 인생은 화분에 꽂힌 꽃과 같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일을 겪을지라고, 이것은 화병에 물을 갈아주어 잠시 활기를 띄게 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구원은 뿌리가 잘린 꽃에 새로운 뿌리가 내리는 새창조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아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모든 일“이란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모든 가족 역사와 특히 18-21에서 서술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감당해야 할 고난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에서 나오는 기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사명 기적이나 해방 기적이다. 기적이 요셉과 마리아를 (메시아의 부모가 된다는) 교만이 아니라 수치로 인도하였다.  

신약에서 일어나는 일은, 구약에서 예고된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예고와 그 성취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이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나타낸다.  

본문의 „처녀“라는 말은, 유대인이 사 7:14에 나오는 „젊은 여자“를 실제로 동정녀의 의미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원전 3세기에 번역된 그리스 구약성경(70인 역)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을 위해 당시의 공용어로 번역된 것으로서, 마태복음보다 약 300년 전에 쓰였는데, 그때 „젊은 여자“를 이미 „동정녀“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사 7:14는 동정녀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 7:14(„...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의 „임마누엘“과 같은 분인가? 만약, 마태가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생각지 않았다면, 그는 사 7:14의 앞부분만 인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마태는 임마누엘과 예수님이 같은 인물이라는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짐작할 수 있다: 마태는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사 7:14와 8:8,10에 나오는 임마누엘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사람 이름이 아니라 상징적인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사야 시절에 이미 임마누엘이라는 아이들이 탄생했으므로, 이 예언이 일차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예언은 그것으로 마감되지 않고 예수님에 의해 더 깊은 본래의 의미로 성취된 것이다. 예언은 2중으로, 3중으로 성취된다.  

그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다“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예수라는 분과 그분의 사역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 이것으로써 임마누엘이 성취되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시 인간과 함께 하신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셔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는 요셉의 순종에 대해 극히 간결하게 보도한다. 성경은 원래 이와같이 인간의 생각이나 느낌, 심리에 대해서는 잘 보도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그가 순종한 행위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그가 ...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결심, 실행,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 마리아를 (나쁜 소문으로부터) 보호하고 도와주는 것, 하나님의 뜻에 머리를 숙이는 것, (메시아의 탄생)을 기대하는 것. 마리아는 이제 요셉의 집에서 살게 되었고, 다윗의 가족이 되었다. 물론 요셉은 „아들을 낳기까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리아의 동정녀 상태의 몸을 그분의 장막(요 1:14)과 자신의 성전(고전 6:19)으로 사용하신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과 두려움에서 나온 요셉의 행위였다. 마리아는 그 이후 요셉에게 4명의 아들과 적어도 2명의 딸을 낳아주었다(마 12:46 이하; 13:55-56). 이 모든 것은 천사가 고지한 대로 이루어졌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과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14세밖에 되지 않은 소녀였으나, 남편과 함께하기도 전에 임신했다는 큰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적어도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여 메시아로 밝혀지기까지는 간음녀라는 혐의 속에서 살아야 했다. 유대인 전통에서는 아직도 예수님이 마리아와 로마 군인 사이에 난 사생아라고 전승되고 있다. 그녀가 이것을 일생 잘 감당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요셉은 앞에서 설명한대로 자기 아내가 간음녀라고 생각했으나 분노와 실망의 감정을 잘 다스리고 그녀를 살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듣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자기 아내의 몸을 장막으로 사용하신 그분을 두려워했다.

이렇게 메시아를 낳은 부모는 하나님에 대한 일관적인 순종과 경외심으로 좋은 본을 남겼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자에게는 이러한 순종과 경외심이 요구된다는 것을 배운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로 오셨다.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인생은 정말로 짧다. 뿌리가 잘린 꽃처럼 꽃병에서만 살지말고 참회를 통해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뿌리를 내려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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