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장 18-25절 언약대로 나신 예수 - 김광선 목사

재영구리 2023. 2. 25.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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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18-25절
설교제목 : 언약대로 나신 예수
설교자 : 김광선 목사님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이것은 인류 역사와 함께 계속되어진 철학의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니체는 ‘신은 한 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니체는 하나님과 단절된 자신의 존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미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의 현대 철학과 사상이 니체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미쳐 돌아가는 듯 한 세계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니체처럼 하나님과 단절된 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진지하게 자기 존재와 자기 세계에 몰두하는 사람일수록 비사회적이 되고,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약간 미친 기질이 보이게 됩니다.

천재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정립하는 엄청난 업적을 남겼지만 그는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던 불가지론자였습니다.

겉보기에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 같았지만 실제 그의 삶은 무의미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유아적인 방황을 계속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뭔가를 성취함으로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출신으로 대기업의 사장으로 있다가 몇 년 전에 퇴직한 분이 있습니다.
탁월한 그분은 남들보다 먼저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사장까지 올라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어느 날 회사에서 퇴직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 분은 폐인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분은 자신의 지위가 곧 자신인 줄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 지위가 없어지자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사회적인 성공으로 돈도 모았으나 지위가 자신인 줄 속고 살았던 세월이 허망하고, 자신의 존재가치가 더 이상 쓸모없게 돼 버린 현실을 감당할 수가 없어 폐인이 되다시피 한 것입니다.
아마 회사에 근무하시는 분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잘못된 환상일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지위와는 다른 것을 빨리 깨달을수록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질문 앞에 ”신은 없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의 실제 내면의 삶은 니체나 아인슈타인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된다면 분명 그의 인생관, 가치관은 송두리째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그분이 나를 창조했고, 그분이 창조한 세상에서, 그분이 공급하시는 모든 자원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도 내 의도대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의도대로 지금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딸과 사위 내외가 방학을 맞아 인도에 왔습니다.
한 달 정도 함께 지낼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습니다.
딸과 사위는 아버지 집에 있는 같이 있는 동안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먹을 것 걱정 안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신경 써서 준비해 줍니다.
자기들끼리 먹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으로 먹여 줍니다.
집 걱정 안합니다.
아버지 집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어디 가야 할지 걱정 안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짜 준 스케줄대로 가면 됩니다.
그 스케줄은 딸과 사위를 위해 미리 계획한 것들입니다.
어디 가고 싶다고 말하면 기사 시켜 차 태워 보내 줍니다.

함께 차도 마시고, 삶을 나누고, 장래 이야기도 하고, 같이 돌아다니고, 운동도 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 보기도 하고.....
딸, 사위는 아버지가 인도에 사시고 아버지의 집이 인도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면 인생관과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함께 살기 때문에 그의 삶은 안정이 되고, 영적으로 그리고 현실의 삶 속에 아버지로부터 실제적으로 공급을 받고 살 수 있기 때문에 목적이 있는 삶, 의미 있는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인도에 배낭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인도에 뭔가 신비한 것이 있는 줄 알고 오지만 실제 여행을 하면서 환상이 왕창 깨지고 맙니다.
물론 좋은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가는데 마다 속이려는 사람들로 붑빕니다.
속느냐 속지 않느냐의 싸움으로 여행은 지치게 됩니다.
친절한 인도인이 준 음료수와 비스킷을 먹고 실신한 후 깨어 보니 여권과 가방이 몽땅 없어지는 사건은 비일지재 합니다.
미네랄워터인 줄 알고 먹었다가 설사를 만나 며칠 씩 꼼짝 못하고 누워 있기도 합니다.
델리에서 아그라 가는 길 도중에 한국 식당이 생겼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살다 온 인도 사람이나 네팔 사람이 연 식당인데 거기서 돼지 불고기를 먹고 균에 감염이 되어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길거리에 돼지들 흔하잖아요.
그 더러운 돼지를 먹었으니 성할 리가 있겠습니까?
도처에 예기치 못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바라나시 여행 중에 미쳐 버리는 여행객들도 있고, 종종 강도를 당해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도 책임져 주는 사람이 없는 인도 여행을 혼자 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혼자서 세상을 산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황량하고, 고달프고, 고독한 여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완전히 달라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계신가?

I. 언약대로 나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를 ‘언약하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증명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이 ‘언약하고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언약하고 그 언약을 이루는 자기 존재 증명만큼 분명한 방법 외에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언약하시고 이루셨습니까?
아담을 창조하신 후 삼 대 축복의 언약을 하셨습니다.
‘자손과 땅과 통치’에 대한 언약입니다.
같은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하셨습니다.
즉 언약이란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하나 하나 이루어 가시는 역사적 과정이 이스라엘의 역사이고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찬양한 내용이 시가서이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언약의 내용을 예언토록 하시고 예언을 이루시는 것이 선지서들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모든 언약의 내용들은 신약시대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이룰 영원한 언약성취의 예표들인 것입니다.

1. 자손에 대한 예표는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구원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믿는 나를 통해 이 땅에 많은 사람
  들이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비전입니다.

2. 땅에 대한 예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를 믿는 나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고 땅 끝까지 선교가
  이루어지는 비전입니다.

3. 통치에 대한 예표는 성도들이 성령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고 살
  게 될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고 살기 때문에 하늘의
  기쁨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 언약이 지금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
이 보다 더 분명한 자기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결론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인될 때 우리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송두리째 변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뜻에 따라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좋은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안 좋은 것 같은데 하나님의 뜻은 다른 것입니다.

요셉의 생각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집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요셉이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형들에게 팔려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아버지의 형들의 가족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근동 지역을 구원하면서 하나님의 사심을 알리는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내 생각에는 불행한 일이,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좋으신 뜻인 줄 알기 때문에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믿는 사람들은 인생관,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고,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을 피우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내 삶 속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차게 됩니까?
왜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내가 진정으로 고마워 할 사람들은 나를 배신하고, 내게 상처를 주고, 내 인생을 망가뜨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들을 지금 내게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지금 나의 삶이 그분의 의도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대로 ‘언약하시고 언약을 이루어 주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계시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고 분명한 계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자연적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같이 살게 되면 아이가 태어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하신대로 태어나셨습니다.

본문 22절에 나타난 대로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주전 7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의 기록입니다.

그 분은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예언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6절에,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은 이미 주전 700 년경에 선지자 미가가 예언했습니다.

미가서 5장 2절의 기록입니다.

아기 예수는 태어나 애굽으로 피난을 갈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5절에,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 역시 주전 700년경에 선지자 호세아가 예언했습니다.

호세아 11장 1절의 기록입니다.

그분의 탄생으로 인해 헤롯왕이 많은 아이들을 죽일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에,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고 했습니다.

이 예언 역시 주전 600년경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아 31장 15절의 기록입니다.

그 분의 사역을 준비케 하기 위해 세례 요한을 보낼 것을 예언했습니다.

마태복음 3장 3절에,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은 주전 700년경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이사야 40장 3절의 기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은 무려 600회 이상이나 됩니다.
‘하나님은 언약하시고 언약하신대로 이루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내게 언약하신 것을 이루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될 때 인생관, 가치관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언약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II. 성탄의 목적

1. 죄에서의 구원

본문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창조 하실 때 이미 둘째 아담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 보내실 성탄을 계획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12-14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오실 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들기 전부터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케 하여 택한 자들을 구속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창세의 계획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이미 설교 했듯이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를 허용하신 것이라는 것에 연구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지만 사실은 허용 정도가 아니라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작정 섭리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죄짓기 전에 인간을 구원했으면 좋았을 것을 죄를 짓게 한 다음에,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은 다음에 인간을 구원하셔야만 하는가?

첫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인이 되 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통해 탕자가 제대로 된 참 아들로 살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집을 나가게 하여 죄에 빠지게 하고, 실패하고, 망해 거지가 된 탕자를 받아 줌으로써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하여 참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 불순종 가운데, 죄 가운데 처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가운데 죽었기 때문에 우리를 은혜로 살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살리시려고 우리를 죄악 가운데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3장 22절에,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쌍해서 모세를 세워 구원해 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시기 위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어떤 자녀가 생기기도 전에 창세기 15장에 하나님께서 400년 후에 되어질 일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15장 12-17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저는 정녕이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니라”(창15:12-17)고 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의 구원은 십자가의 부활로 그 완성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속죄를 완성케 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죽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이 하나님 은혜로 살게 하시려고 죄로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영원한 은혜를 인간에게 계시해 주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구약의 역사를 통해 줄기차게 보여 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약해도, 범죄해도,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도, 우상을 숭배해도, 하나님을 배반해도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축복의 언약들을 이루어가십니다.

때리셨다가 싸 메기도 하시고, 높이셨다가 낮추시기도 하시고, 가두었다가 해방시키기도 하시면서 당신의 축복의 언약을 성실하게 이루어 가심으로 영원하신 은혜를 보여 주었습니다.

한 때 자신의 부족과 죄악과 상처들 때문에 죽을 정도로 괴로워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살게 하시려고, 은혜를 깨닫게 하시려고 부족과 죄악과 상처를 주셨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나를 망하게 할 것 같았던 부족과 죄악과 상처들마저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보석과 같은 귀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은혜로 살게 하고, 은혜를 깨닫게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것일까요?
당신의 영원한 자비성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 자비성 계시의 최고봉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비성을 계시하시는가?
그런 질문은 ‘왜 하나님이 계시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굳이 답을 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본문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였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7장 15절의 말씀의 인용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 아하스 왕 때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전쟁을 일으켜 유다를 치러 왔습니다. 거기다 에브라임까지 동맹을 하여 그야말로 사면초가 되었습니다.

이는 도무지 승산이 없는 싸움입니다.
마치 북한이 중국과 일본과 동맹하여 남한을 쳐들어 온 것과 같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에게 말합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 그들이 너희를 점령하지 못하리라, 정말 내 말을 믿지 못하겠느냐?
그렇다면 내게 징조를 구하라“
그러자 아하스가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 징조는 무슨 징조입니까? 아람과 이스라엘과 에브라임 연합군이 쳐들어 왔는데 전쟁 하나 마나 뻔 한 것 아닙니까? 징조는 무슨 징조가 필요합니까?”

아하스의 불신앙이 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하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은 계속됩니다.
"그래 네가 나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좋다 내가 한 징조를 베풀리라
보라, 이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세상에 이런 징조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연합군이 쳐 내려 오고 있는데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든지, 지진을 일으키든지 해서 적군을 막아주실 생각은 안하고 전혀 뚱딴지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과 연합군이 쳐들어 내려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것은 당장 이루어질 일도 아니고 700년 후에 일어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인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처녀가 혼자서 아이들 갖는 것과 네가 연합군과 싸워 이기는 것 중에서 어는 것이 더 어려원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느 것이 더 쉬어 보입니까?
처녀가 혼자서 아이를 갖는 것이 훨씬 불가능합니다.
전쟁에서는 상대방이 나보다 훨씬 강하다 할지라도 작전을 잘 짜거나 지형을 잘 이용하거나, 기습공격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불과 십여 척의 거북선을 가지고 수백 척의 왜군 전함을 격파했습니다.
그 유명한 명랑해전입니다.
그러나 처녀가 남자 없이 혼자서 애를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데로 아기 예수가 700년 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게 됩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 불가능한 일도 내가 할 수 있는데 하물며 그 전쟁에서 이기는 일쯤이냐 내게 큰일이겠느냐?
너는 나를 믿으라" 며 아하스를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어떤 문제도 해결된다’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소식은 실로 우리에게 기쁨이요 소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성경의 언약대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것이 계시된 가장 탁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지금도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이 내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축하하며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보라, 이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축하하며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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