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 최동규 목사
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1-17절
설교제목 :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설교자 : 최동규 목사님
마태복음의 첫 단락에 해당하는 오늘 본문은 분량은 길지 않지만 읽기가 쉽지 않아서 대충 읽고 건너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마태복음의 총 주제인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선언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탄절을 즈음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나타난 몇 가지 의미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은 일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쓰인 복음서입니다. 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계보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계보를 따지지 않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구조상으로 매우 정교하게 계보를 구성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단순하게 이름을 나열하지 않고, 구조의 일관성을 깨뜨리는 흥미로운 몇 가지 파격적인 일탈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효과적으로 표현했습니다.
1절을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다, 그는 다윗의 아들이요,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이다”가 됩니다. 그래서 계보의 머리말인 1절과 맺음말인 17절의 이름순서는 대칭구조(예수 그리스도, 다윗, 아브라함 그리고 아브라함, 다윗, 그리스도)로 감싸져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2-16절의 내용이 가장 바깥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유대 문학의 기교입니다. 원래 계보는 조상의 이름을 따라 명칭이 붙습니다. 이 경우 아브라함의 계보라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아브라함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말하고 있으며, 구조상으로도 그리스도를 강조했습니다.
또 1절의 ‘세계’(비블리오 게네세오스)라고 번역된 단어는 구약에서 단지 두 번만 쓰인 독특한 용어입니다. 창 2:4절의 ‘천지의 대략’과 5:1절의 ‘아담의 계보’에서 ‘대략’과 ‘계보’가 같은 용어입니다. 그 단어는 ‘하늘과 땅의 시작’ 그리고 ‘인류의 시작’을 소개하는 곳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용어를 접할 때, 뭔가 중대한 ‘새로운 시작’이 있을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의 시작이고, 다윗은 왕조의 시작입니다. 마태는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서 새로운 우주, 새로운 인류, 새로운 이스라엘의 시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복음은 하나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을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4가지 복음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동일한 복음일지라도 일차적인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처럼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그 전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태는 이를 위해 그 시대의 다양한 문학적 기교들까지 정교하게 활용했습니다. 대상을 연구해서 어떤 용어와 어떤 방식을 사용하면 좀 더 쉽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심했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도 시간이 지나다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요행을 버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을 동원해서 성실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성인을 선교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 맞는 노력 또한 필요합니다. 기존에 대학생 전도를 위해 사용했던 우리 모임의 방식은 이제 대학생들보다는 중고등학생들에게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상을 바꾸든지 아니면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술과 담배를 삼가 하는 것, 주일예배 필참 등도 한국적 정서에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복음을 변질시키지 않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전파하려한 마태의 노력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교한 계보 구조 속에서 파격적인 일탈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의 첫 번째 예로 다윗의 이름에만 ‘왕’이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다윗 왕의 계열을 따른 왕적 메시아로 오신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강조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더 두드러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동시에 다윗 왕의 아들로서 ‘만왕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입니다. 사실 계보에는 아브라함보다 다윗이 더 많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단어는 계보에서 3번 나온 후, 마태복음 전체에 걸쳐서 불과 3번만 언급됩니다. 그러나 ‘다윗’이라는 단어는 계보에서 5번 나온 후, 마태복음 전체에 12번이나 더 나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말하지만, 그보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임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아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 분을 통해서 복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반면에 그분이 우리가 복종해야 할 왕이 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그 복은 다윗 왕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복입니다. 마태복음은 시작부분에서 동방박사가 예수님께 경배하는 장면을 다루며, 마지막 부분에 제자들이 경배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을 진정으로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 분께 마땅히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 삶에서 진정한 왕은 누구입니까? 우리 가정에서는 누가 왕이 되어 있습니까? 학교에서 혹은 직장에서 우리는 누구를 왕으로 생각하고 복종합니까? 나의 시간과 나의 열정과 나의 소유물이 왕 되신 그분의 뜻에 따라 쓰여 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늘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그 분께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또 하나의 일탈현상은 남성 위주였던 유대 사회에서, 특히 계보에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계보에 등장할 만한 여인이라면 쉽게 ‘사라’나 ‘리브가’ 같은 인물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가 기록한 여인은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이 네 명은 모두 결혼 생활이 정상적이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말은 원래 엘의 아내로서 자식을 얻지 못한 채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기 남편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시아버지인 유다를 유혹해서 동침했고, 쌍둥이인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라합은 직업 창녀였기 때문에 성적으로 문란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룻은 사별한 후에 아버지뻘 되는 연령의 보아스와 재혼했습니다. 그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도, 룻기 3:6-18절에는 그녀가 보아스와 결혼하기 전에 그와 잠자리를 같이 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날 둘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룻의 행동은 결혼하지 않은 남녀 사이에서는 몹시도 부적절한 행동이었습니다. 또 우리야의 아내라 기록된 밧세바는 남편인 우리아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는데, 다윗 왕과의 사이에서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간통했고, 간통 후 남편이 죽자 간부였던 다윗과 재혼했습니다. 네 명의 여인은 모두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문제가 있었었습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을 맺었기 때문에 부끄러운 과거가 승화되어진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네 명의 여인은 이방인이거나 적어도 이방인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말은 가나안 여인(창 38:11,13-14; 대상 2:4)이었고, 라합은 여리고 출신이었습니다(수 2장, 6장). 룻은 모압 여인이었고, 밧세바는 남편이 헷 사람이었습니다.
여자를 무시하고 죄인과 상종하지 않으려 했던 유대인, 또한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며, 선민의식이 강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계보는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부끄러워서 감추고 싶은 계보일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소외된 약자들에게 관심이 많은 복음서임에도 계보에는 여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마태가 이를 기록했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일탈이었습니다. 마태는 이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여인들, 죄인들, 이방인들까지 포함 되어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만, 혹은 유대인들처럼 하나님 중심의 종교의식이 습관화 된 사람들을 귀하게 사용하신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도 쓰십니다. 감추고 싶은 가계의 비밀을 가진 사람도 쓰십니다. 교회사를 볼 때도 어거스틴은 그 시대에 유명한 탕자였습니다. 루터는 성격이 조금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허물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시므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게 하셨고, 오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선한 왕도 등장하지만 사악한 왕도 많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떤 왕이 등장했느냐에 따라 파란만장한 격변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나라가 흥하기도 했고 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을 차질 없이 성취하셨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역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움직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해 한해가 빠르게 변모합니다. 게다가 북한의 핵문제로 인한 전쟁의 위험은 항상 우리 가운데 잔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민족의 미래가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불확실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해서 당신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불안정하고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기보다 하나님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인생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태의 계보에서 가장 파격적인 일탈현상은 16절에서 발견됩니다. 그동안은 ‘A가 B를 낳았다’는 구조로 계보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도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라고 기록되는 것이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그녀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출생되었다”는 전혀 새로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낳는’ 주체인 아버지가 생략되었고 마리아도 관계대명사로 언급될 뿐입니다. 부모가 적극적으로 출산했다는 능동적 표현 대신에 ‘신적 수동태’를 사용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마태는 예수님의 출생이 그 이전의 출생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비록 인간의 계보를 통해 오셨지만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나타나 있는 몇 가지 의미를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성탄절에 즈음하여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