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장 3-9절 예수님의 VIP(8) 한 여자 - 이동원 목사
설교본문 : 막 14장 3-9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VIP(8)한 여자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기독교 사회학자요 설교가인 토니 캄폴로(Tony Campolo)교수의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가 자기 친구 집을 방문했다가 들은 이야기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친구에게 만 4살 먹은 딸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폭풍우치고 무섭게 번개 치던 밤 갑자기 딸이 2층 방에 혼자 있는 것과 2층에서 딸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 얼마나 딸이 겁나있을까 생각이 나서 캄폴로 교수의 친구가 2층으로 급히 뛰어 올라갔더니 그의 딸이 창문 앞에 양 팔을 벌리고 선채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감사해요. 저를 사진 찍어 주실거지요. 멋있게 찍어주셔요” 그날 밤 그 친구는 자기 딸의 존재를 하나님이 보낸 천사처럼 느꼈고 그의 가족에게 그 두려운 밤이 잊기 어려운 행복한 밤이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캄폴로 교수 또한 자기 친구의 천진난만한 딸의 이야기를 통해 감사의 진정한 의미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폭풍우치고 뇌성 번개 요란한 밤을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 사진을 찍어 주시고자 플래쉬를 터트리시는 것으로 해석할줄 안 그 로맨틱한 소녀의 마음 그리고 어른들조차 두려워하던 그 밤 이 소녀의 입술에서 나온 소리 “하나님, 감사해요”는 그 어떤 신앙 고백보다 위대한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한 여자 사건이 일어나던 상황이 바로 폭풍우 몰아치고 뇌성이 울리던 밤이었습니다. 막14:1-2을 읽어보십시오. 당시의 가정 대표적인 종교인들인 대제사장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하던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밤에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감사 사건’이 일어납니다. 본문 3절은 ‘한 여자’의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2:3에 의하면 이 여자의 이름은 마리아(나사로의 누이)였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여자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던 이 여인의 헌신을 의도대로 보존하고 싶어 한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의 설교 제목을 그냥 ‘한 여자’라고 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헌신만은 숨겨 질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의 9절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주께서 친히 옥합을 깨트려 감사를 드린 이 여인을 하나님 나라 역사의 가장 소중한 VIP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감사절을 앞둔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여인을 통해 참된 감사의 영성을 학습하고자 합니다. *진정한 감사-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1.할 수 있는 곳에서 드려야 합니다.
다시 본문 3절을 읽어보십시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어디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본래 나병환자였던 그가 예수님에 의해 치유를 받은 후 감사함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열린 일종의 보은의 잔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미 치유를 받았지만 이웃들은 아직도 그를 ‘문둥이 시몬’이라고 부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 식사는 일상의 식사 자리가 아닌 시몬의 가족들이 공개적으로 예수의 은혜를 감사하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본문을 요한복음과 비교하면 상황을 좀더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요한12:1-2을 보십시오. “유월전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쌔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중에 있더라” 이어서 3절 이하에 마리아의 헌신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 잔치가 “예수를 위한 잔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식탁에는 나사로 또한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잔치가 열린 곳은 시몬의 집입니다. 그가 호스트 곧 주인이었습니다. 그는 불치의 병에서 치유 받은 감격을 가지고 이 자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이 잔치의 사실상 또 한 명의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베다니 마을을 묘사하며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로 나사로는 죽음에서 다시 산 기적의 부활을 체험한 표현하기 어려운 감사로 이 자리에 달려오지 않았겠습니까? 시몬의 집에서 열린 이 잔치는 진실로 메시아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자발적인 감은의 잔치였던 것입니다. 오빠가 주의 은혜로 다시 사는 것을 보고, 불쌍했던 이웃 시몬이 고침 받은 기적을 보고, 베풀어 주신 말씀으로 구원을 체험하고 인생의 새 소망을 얻고 있었던 마리아는 또 어떻게 그대로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는 이 공동체의 감사에서 열외자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물론 개인적으로 언제라도 주께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는 구약에서부터 늘 이런 ‘공동체의 감사’라는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구약의 초막절이 그것입니다. 일 년의 추수를 마치고 온 가족이 집 옆에 ‘수카’(succot)라는 천막을 치고 마치 그들이 광야를 지날 때 천막을 가지고 이동하며 주의 인도를 받아 왔던 것을 회상하며 감사의 축제를 열었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의 자유를 찾아 도착한 새 약속의 땅에서 첫 해를 지나며 그들의 정착을 도왔던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칠면조를 잡고 감사의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수 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가정들이 이 감사의 시즌에 온 식구가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하루 저녁이라도 가족적인 감사의 만찬 예배를 드리시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또한 새벽 축제에 온 가족이 참여하여 한 해를 인도하신 은혜를 돌아보며 또 한해를 설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교회적으로 또한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교회로 나아와 공동체의 감사의 축제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할 수 있는 곳에서 구체적으로 감사할줄 아는 성도가 되십시오.
2.할 수 있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여인 마리아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감사할까? 그리고 이 여인은 고이 간직해온 옥합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아마 결정적인 인생의 중요한 때 그녀는 이 옥합속 향유를 사용하고자 준비해온 그녀의 소중한 자산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본문 5절에 이 향유의 가치가 300데나리온 이상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평범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치는 300일의 샐러리 거의 일년 봉급에 해당하는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머리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할 수 있는 헌신이었고 해야 할 헌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어리석은 허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견해는 달랐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기서 ‘좋은 일’이란 표현은 ‘아름다운’으로 변역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낭비였습니다. 저는 ‘낭비’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화장’입니다. 저는 여인들이 화장하시는 것을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본래 아름다운 분들이라면 화장은 낭비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름답지 못하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화장해보아야 얼마나 개선되겠습니까? 그것도 낭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가장 아름다운 가치 있는 낭비가 헌신 혹은 헌금이라고 가르칩니다. 왜 일까요? 주께서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사랑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예절은 최소한의 의무에서 끝나지만 사랑은 최선의 헌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신약적 인가를 시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물론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을 체험한 성도들이라면 얼마나 주께 드려야 합당할까요? 의무감에 의해 법적으로 십일조를 드렸다면 생명과 사랑에 빚진 자들은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일본에 그리스도인 사회사업가였던 이시이 쥬지 선생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맹인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 자기의 우울증을 호소하며 어떻게 밝게 사는 비결이 없겠느냐고 물었답니다. 이시이 선생은 그에게 “점자 성경을 읽을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읽지 못한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안마를 할수 있느냐?”고. ‘예’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회는 나가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십일조를 드리냐”고 물었습니다.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두 가지 실천을 해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 안마해서 얻은 수익에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첫째 십일조를 드릴 것, 둘째로는 두 번째 십일조로 당신보다 더 불쌍한 이웃들을 구제하고 섬겨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가 한 달 후에 이시이 선생을 찾아와 “선생님, 제 일생에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행복감과 기쁨이 제 마음에 넘쳐 납니다.”라고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이시이 선생은 이 맹인에게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할 수 있도록 안내 한 것뿐이었습니다. 아름다운 헌신만이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3.할 수 있는 때에 드려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여자가 옥합을 깨고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린 때가 언제였습니까? 14:1을 보십시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예수님은 유월절 주간 마지막 날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사건은 금요일 유월절 시작 이틀 전 수요일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어 십자가로 가시기 불과 9일 전이었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이 예수님께 이 사랑의 표현을 드리지 못하고 주님의 임종의 소식을 접했었더라면 그 얼마나 뼈저린 회환이 되었을까요? 그러나 다행히 그녀는 기회를 잃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자 마가는 이 때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지 않습니까? 8절입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봉사의 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헌신의 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사랑의 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기회라는 말을 우리는 영어로 ‘opportunity'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본래 ob+portu(앞에서+항구)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현대적인 선착장이 마련되기 전 배들은 항구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바라보다가 파도가 몰려오기를 기다려 항구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한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파도가 돌아오는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파도가 몰려 올 때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응답해야 합니다. 감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온의 전기 작가는 그의 인생에서의 영웅적인 승리의 비결이 전장에서 언제나 최후의 5분을 잘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금년이 아니 이 달이 아니면 혹시 금주가 우리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면 어떻게 주님 앞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최근 베스트셀러로서 그리고 영화로 우리의 가슴을 울렸던 작가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우리의 시간의 제한이라는 운명 속에서 사랑을 다시 발견한 애절한 레슨이었습니다.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나 교수로 가수로 인기와 돈을 누리면서도 세 번이나 자살을 감행한 미대 교수 유정 그리고 세 사람이나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 윤수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상처 받고 상처 주는 인생 속에도 마음을 여는 순간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치유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다시 살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형수 윤수의 마지막 남긴 편지에는 그런 회한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살아서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에 태어나 내 입으로는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그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사랑한다고 말입니다.”한 평론가는 이 책의 소감을 이런 만회할수 없는 시간의 독백으로 마무리 합니다. “그래도 죽기엔 남은 삶이 너무 아깝지 않겠니? 니가 쓰레기 통에 버리는 30분이지만 누군가는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기다리는 그 시간 그 시간--” 그 남은 시간에 우리가 할일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