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레위기

레위기 23장 39-44절 초막절의 감사 - 이동원 목사

재영구리 2023. 4. 7.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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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레23장39-44 
설교제목 : 초막절의 감사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본래 추수감사절 Thanksgiving Day 라는 것은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에 도착한 그 전통에서부터 유래한 것이죠. 그러나 성경에서 이 추수감사주일과 가장 비슷한, 유사한 절기를 찾는 다면 그것이 바로 초막절입니다. 초막절. The Feast of Tabernacles 초막절이라고 불리워 집니다.

해마다 이 명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나가서 본래 옛날에는 그랬어요. 광야에 나가서 빈 들에다가 초막을 짓습니다. 요즈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집 옆에다가 붙여서 초막 하나를 만듭니다. 네 개의 그 프레임에다가 캔버스나 혹은 팬널 같은 것으로 사방을 만들어서 벽을 만든 다음에 그 위에다가는 감람나무 혹은 종려나무 혹은 버들가지들을 얹어서 지붕을 만드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호텔 같은 데도 전 번에 우리가 초막절 때 성지 순례를 한번 한 적이 있었는데 호텔 옆에다가도 이 초막을 만드는 것을 봤습니다. 호텔 식당 옆에다가 만들어 갖고 그 식당에 들어가서 먹는 사람도 있지만 식당 옆의 간이초막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식사를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리고 성경도 읽고 예배를 드립니다. 특별히 시편을 읽기도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이런 초막을 가리켜서 히브리 사람들은 수코트 이렇게 부릅니다. 수코트. 제가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 보니까 이 사람들은 이것을 영어로 수카 이렇게 부르더라구요. 수카.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수코트 이렇게 부릅니다. 그들은 자기의 수코트를 잘 만들뿐만 아니라 남의 집의 수코트도 돌아가면서 방문하면서 서로 어울려서 파티를 열고 한 주간 동안 일 주일 내내 즐거워하는 명절 가운데서도 아주 기쁨의 절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요컨대 이 초막절은 지나간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을 감사하는 절깁니다. 그 광야를 행진할 때 낮에 구름 기둥 인도했죠 열사의 사막에서는 그 사막에서 태양을 견딘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구름 기둥이 일종의 천막 역할을 해 줍니다. 피난처가 되고 보호막이 되고 또한 그 구름 기둥이 가면서 계속 이 백성들을 인도했고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이 가야할 목표와 방향을 알려 주어서 그들은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배고팠을 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고 마실 것이 없었을 때 반석을 깨어서 거기서 샘물을 솟게 하신 그 하나님의 공급의 은혜를 그들은 기억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그 절기 초막절에 맞춰서 이제 추수가 다 끝납니다. 그러니까 농사 짓고 수확을 거두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절기죠. 그러나 그것말고 이 초막절은 특별히 세 가지의 감사의 초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정에 대한 감사, 둘째는 믿음의 공동체에 대한 감사 또 하나는 영원한 소망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첫째는 가정에 대한 감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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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코트 라는 것은 이 초막, 천막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코트는 가족에 의하여 혹은 가족들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시련이 있었지만은 그들은 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에너지가 가족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녀들, 가족 사이에서 나누어지는 그 사랑의 힘이, 사랑의 에너지가 그 광야의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이길 수가 있는 그런 힘의, 용기의 근원이 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 현대를 가리켜서 소위 핵가족화의 시대라고 불리워 집니다. 편리주의가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는 이제는 식구들이 많아지는 것이 부담스러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조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죠? 심지어는 부모님조차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자녀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부모는 자녀를 하나 늘어날 때마다 부담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확실히 많습니다. 가족을 이제는 짐이라고 burden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탈무드에 읽어보니까 아주 재미나는 얘기가 있어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족들은 새의 날개와 같다. 새는 날개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는다. 새는 날개 때문에 오히려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비상할 수가 있다.

 제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커플들을 꼭 한 번씩 만나서 상담을 한 다음에 주례를 합니다. 그냥 주례하지 않습니다. 꼭 한번 대화를 나눕니다. 그때 제가 어김없이 묻는 질문 가운데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애를 몇 명이나 낳을 계획이십니까? 혹은 언제 낳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요즈음 대부분의 그 커플들은 빨리 낳겠다고 그러는 사람이 없어요. 3년 후에, 4년 후에 어떤 사람들은 5년 후에 낳겠다고 말합니다. 왜 그래요 하고 물어보면 좀 더 안정이 된 다음에 하는 것이 제일 대답이 많습니다. 그 때마다 제가 반드시 탈무드의 이 말을 인용합니다. 가족들은 부담이 아니예요. 자녀 하나 생긴다고 해서 부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를 보면 얼마나 기쁨이 있습니까? 삶의 용기, 에너지, 영감, 힘을 얻고 살아야 할 그 의지를 확인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말고 닥치는 대로 나요. 빨리 나요. 제가 이렇게 웃으면서 늘 권면을 해 주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 가족들의 존재,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 힘이 됩니까? 가족 때문에 어려움도 있죠. 그러나 어려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축복, 훨씬 더 많은 사랑, 훨씬 더 많은 격려가 우리의 가정에서 나누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수콧이라는 것은 가족들의 shelter 사랑의 보금자리 그리고 안식의 피난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수코트를 만들어 놓고 이 수코트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고백하고 축제를 벌이고 그리고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IMF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가족마저 없었더라면 우리의 홈이 없었더라면 나를 격려해 주고 나와 함께 하는 내 남편의 존재, 아내의 존재, 그리고 자녀들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더 무력해지고 얼마나 우리는 더 낙심 했었을까요? 이 시대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첫번째 감사예요.

 두 번째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수콧, 자기 가정을 위한 수코트를 만들지만 또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수코트를 방문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옛날에는 아주 광야에 나가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거할 수 있는 굉장히 큰 천막, 수코트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시나고개, 회당 같은 데 방문을 해 갖고 또 시나고개에서 큰 천막을 만들기도 하구요. 또 그렇지 못한 형편의 시나고개 회당에서는 회당 안에 들어가서 종려나무 가지 혹은 감람나무 혹은 버들가지들을 취해서 회당 안에다가 여러 가지 장식을 해 놓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행진이 비단 나의 가족의 행진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모여진, 더 큰 가족, 공동체의 행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수코트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수코트, 우리가 함께 머물 수 있는 커다란 공동체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더불어 광야 길을 행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가족이 내게 위로가 된 것 못지 않게 또한 주변에 같이 하나님을 고백하고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더불어 나눌 수 있었던 격려와 위로 때문에 광야의 길을 우리가 걸어갈 수가 있었다. 이것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약적인 시각, 신약성서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바로 이 믿음의 공동체가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교회.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서 사회를 향해서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저는 그 비판이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참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단 하나의 교회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세상, 한번 상상해 보세요. 교회가 부끄러운 요소도 많지만 교회가 줄 수 있었던 축복,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마다 드린 예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영감과 그리고 삶에 대한 감동과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내 속에 회복된 기쁨과 평화와 안식의 체험들 또 교회 생활하면서 얻어진 수많은 행복한 메모리, 그 추억과 감동의 순간 순간들, 성도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면서 함께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얻을 수 있었던 따뜻한 교제 속에 누릴 수 있었던 그런 안식의 의미. 그런데 그 교회가 하나도 없이 사라진다. 교회가 사라진 세상. 한번 상상해 보세요. 교회가 없이 내가 지금 인생을 산다. 상상이 되십니까?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노후에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다. 교회를 무시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온다.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가족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지만 그 못지 않게 또한 우리의 가족들이 모여서 형성하고 있는 커다란 가족,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교회. 교회를 주신 하나님 앞에 찬양과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의 감사가 있어요. 그것은 영원한 소망에 대한 감사입니다. 초막절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집을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 요즈음 편리한 시대가 되어서 이스라엘에 가도 초막절을 지킬 때 먼 광야나 사막까지 나가지 않고 자기 집 옆에다가 그냥 초막을 만들고 그렇게 편리하게 지냅니다 만은 그러나 본래 옛날 초막절을 지키던 방식은 들에 나갑니다. 빈들에 나가요. 그 동안 한 주간동안 나가서 야영 camp를 하는 것입니다. 집을 떠나는 것 이예요. 집을 떠난다. 일시적이지만 집을 떠난다. 우리의 정, 우리의 욕망, 우리의 안정의 중심이었던 집을 잠시 떠나갈 때 그들은 집을 떠나는 연습을 excise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느 한 순간 우리는 집을 떠나는 날이 옵니다. 내 영혼이 육체의 집도 떠나요. 그런가 하면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며 메모리를 축적해 왔던, 행복한 기억을 축적해 왔던 우리의 사랑하는 식구들, 가족들을 잠시 떠나서 어디론가 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집이 있다. 예비하신 집이 있다. 그렇습니다. 옛날 애굽 땅의 안일한 집들을 버리고 광야로 놓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광야에서도 집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 가나안 땅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구한 집의 소망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저는 이 영원한 소망이야말로 천국의 소망의 그림자라고 믿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5장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있는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 육체를 가리키는 것 이예요.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나니라 그랬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는 크리스천 가정의 행복은 이런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그 행복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느 날 세상을 떠나갈 때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우리는 이렇게 인사할 수가 있습니다. 여보 내가 먼저 떠나서 미안해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요. 그 영원한 만남, 그 영원한 재회 그리고 영원한 소망 그리고 영원한 처소에 대한 소망.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곁을 떠나면서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그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로 하여금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많은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견고한 아니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 할 소망, 하나님 나라의 소망 그리고 천국의 소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감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킬 때 초막절 바로 직전에 또 지키는 절기 하나가 있어요. 7대 명절이 있습니다. 여섯 번째 명절이 뭐냐 하면 속죄절이예요. 속죄절. 속죄절 다음에 초막절이 옵니다. 속죄절은 고통의 절기예요. 초막절은 최고로 기뻐하는 절기, 버들가지를 취하고 종려나무 가지와 그리고 감람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하나님의 그 인도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축제의 기쁨의 절기 노래의 절기라면 이 속죄절은 고통의 절깁니다. 속죄절에 그들은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서 드려지는 제물 피 흘린 제물.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들은 용서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확인하면서 그 다음 절기 초막절로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약적으로 적용하면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마치 구약시대 하나님이 애굽 땅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떠나가게 하시고 떠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유월절이란 또 의식을 지나가게 하셨죠. 어린양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흘려진 어린양의 피, 대신 제물이 되어서 죽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그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고 해방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나갔습니다. 광야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었고 가나안의 소망을 갖고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적으로 적용하면 무슨 의미예요?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 그 십자가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을 믿으십니까? 아니 이 십자가 때문에 오늘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광야 같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나는 오늘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합니다.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죽음 저 건너편에 견고한 소망 그리고 영원한 소망을 붙들고 있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초막절이 있기 전에 있었던 속죄의 절기, 그들이 피 흘리는 제물을 주 앞에 바치며 하나님 앞에 회개했던 절기, 그 절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축제의 절기로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다는 것, 어려움도 많지만 여전히 내 마음 속에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살수가 있다는 것,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다는 것. 이 감사의 중요한 원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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