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누가복음

누가복음 24장 36-43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Ⅰ) - 박은호 목사

재영구리 2023. 4. 6.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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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누가복음 24 : 36-43
설교제목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Ⅰ)(부활절 후 첫 주일)
설교자 : 박은호 목사님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잘 알려진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어(S. A. Kier- kegaard: 1813~1855)는, ‘인간 존재의 意味’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單獨者로 이해했습니다. 단독자라는 개념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인간 존재는, 더 이상 진정한 인간의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그의 철학의 핵심개념이기도 합니다.


그가 쓴 후기 작품 중 하나인,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S. A. Kierkegaard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병이 곧 절망絶望이라고 말합니다. 그 절망은, 곧 自己喪失을 의미하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한 인간의 ‘죄(Sin)’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절망이라는 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신앙信仰’에 의해서만 고침 받을 수 있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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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病인, 제자들의 절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열한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女 弟子들—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름이 다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25리쯤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시골 마을로 내려가고 있던, 예수님을 따르던 ‘글로바’라는 弟子와 그의 아내로 추정되는 두 사람도, 죽음의 병에 든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 같이 죽음에 이르는 중병重病인 절망에 빠진 자들입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 절망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병의 근원을 찾는 것이 치유하는 길이지 않습니까?(의사) 그들의 절망의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들을 절망케 했습니다.

제자들이 기대하면서 바라보던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 들 앞에서, 말씀과 행동에 능한 者이셨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企待하면서 모든 소망을 그에게 두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제자들의 좌절감은, 그냥 실망한 정도가 아닙니다. 3년 전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은 과거의 모든 것을 삶을 버리고, 예수를 3년 동안이나 쫓았던 자들입니다. 그렇게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그들이, 어떻게 단 한 번의 사건에 의해서 절망해버릴 수 있는가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저와 같이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입학했던 친구들이 60여명 됩니다. 그러나 지금 목회현장에서, 목회하고 있는 사람은 2/3가 채 되지 못합니다. 친구들 중에는, 굉장한 열정을 가진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들 중에 이미 신학을 공부하는 도중에, 신학하기를 포기해 버린 친구도 있습니다. 게 중에는, 신학하기를 포기해 버린 정도가 아니라, 나는 아예 그런 예수 믿지 않겠다고 하면서, 신앙 자체를 포기해 버린 친구도 있습니다.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일이 우리 안에도 한 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아버님이 목회하시던 교회, 장로님의 부친 되시는 어른이 모 교단의 목사로 목회하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목회를 그만 두신 이후, 아예 교회출입조차 하지 않고, 평생을 그렇게 사시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목회만 그만 두신 것이 아니라, 아예 예수를 믿지 않으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심방 가서, 물으셨답니다. “어르신, 그래도 예수는 믿으시지요? 아니요, 나는 예수 안 믿습니다.” 하시더랍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다가 왜, 絶望합니까? 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해 버리게 됩니까? Kierkegaard의 말처럼, 절망은 곧 하나님을 향한 不信仰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病인 절망絶望을 ‘죄罪’라 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던 열한 제자들과 女 弟子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제자 그룹의 사람들이, 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 앞에서 절망하고 말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여인들은, ‘빈 무덤’을 목격하고도 왜, 걱정하면서 울었습니까? 울고 있는 여인들에게, 천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 나셨느니라 하는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왜 두려워했습니까? 왜, 놀랐습니까? 왜 무서워했습니까? 왜? 도망쳤습니까? 여인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使徒들이, 女人들로부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평소에는, 그렇게 신앙이 좋아 보이지만 왜, 결정적인 자신과의 삶의 문제에 부닥치기만 하면, 우리의 믿음은 늘 침묵하고 맙니까? 믿음 없는 자가 되고 맙니까? 왜, 우리는 物質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합니까? 부자 청년 관원과 같이, 도리어 永生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근심하면서 돌아가는 자가 되어버리고 맙니까?

왜, 우리는 그렇게 世上的인 名譽를 얻는 일에는 생명을 걸고 그것을 쟁취하려고 합니까? 도리어 세상에서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사람들의 보기에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셨던 우리 주님의 모습을 닮지는 못하는 겁니까?

누가 더 높으냐?고 논쟁하다가 선생님, 발 씻어드리는 것조차도 잊어버리고, 마지막 유월절 만찬 상에 앉아서 먹고 있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주님처럼, 섬기는 자가 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섬김을 받는 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도자라는 칭함 받기를 좋아합니까? 젊은이들로부터 ‘아버지’라는 이름 듣기를 기대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랍비라고 불려서는 안 됩니다. 사실, 여러분의 스승은 한 분이요. 여러분은 모두 兄弟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땅에서 누구를 여러분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사실, 여러분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십니다. 여러분은 지도자라 불려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마 23, 8-12).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이 ‘지금 여기(Now and Here)’에서, 믿음 있는 자인가? 主님을 믿는 자인가? 주의 말씀에 ‘아멘’하여 應答할 수 있는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여인들이, 평소에는 믿음 있는 자 같아 보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감추어져 있던 그들의 믿음 없음이 다 드러나고만 것뿐입니다. 더 분명하게 다시 말씀드리면, 이런 뜻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였지만, 그들이 속마음으로 기대하고 바라던 것이,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말씀하시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말씀’과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다른 그 무엇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뿐입니다.

바로 그 다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그들을 絶望케 한 것입니다. 그 다름에서 온 바로 그 絶望이, 그들을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르게 했던 그 모든 企待와 비전과 예수 따름의 삶 그 자체를 일순간에 다 포기해 버리도록 만들어 버린 것뿐입니다.

이 점에 특히, 유의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얼마든지 예수를 否認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어떨 때 그렇습니까? ‘내 뜻’과 ‘내 慾心’과 ‘나의 企待’가 무너질 때, 우리들도 얼마든지, 예수를 버릴 수 있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좀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흔히, 그러지요. 내가 지금까지 평생을, 어떻게 主님을 믿고 따랐는데,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단 한 순간에, 내 모든 신앙이 다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絶望합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쉽게 절망하고, 쉽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음의 자리로 내려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절망하여 죽음으로 내려가고 있는 열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 24, 36).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오셔서 말씀하신 평강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물론, 문자적으로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선언하신 평강은 慰勞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언하신 이 평강은, 그런 의미의 평강이 아닙니다. 感情的인 마음의 平穩함이나, 心的인 ‘두려움 없음’의 세상적인 平安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復活하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平康을 선언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는, 十字架에 못 박히셨던 자신의 손과 발을 내어 보이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말씀하십니다(눅 24, 39).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면서, 먹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배가 고프셔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그 실상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지요.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생선을 받으시고는, 그들 앞에서 잡수시더라” 말씀합니다(눅 24, 41-4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직접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또, 먹을 것을 요구하시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드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들에게 平康 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평강을 주고자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평강은, 心理的인 平康이 아닙니다. ‘걱정 없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感情的으로 느낄 수 있는 평강이 아닙니다. 그 평강은, 믿음의 실체를 바꿀 때, 소유할 수 있는 평강입니다. 3년 동안 가르치시고,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새로운 意味로 믿게 될 때 주어지는 평강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치의 변화價値變化’로부터 오는 平康입니다. 비전의 변화에서부터 주어지는 평강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기대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理由를 발견하면서 가지게 되는, 그 平康을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平康은, 全的인 價値變化의 문제입니다. 새로운 삶의 理由와 意味發見으로부터 주어지는 평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平安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世上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 27).

이 평강은, 아브라함이 그가 100세 얻은 그의 獨子,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절망하지 않았던 바로, 그 믿음을 말하는 겁니다. 모리아 산에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 때의 아브라함은, 그의 삶의 이유와 비전이, 全的으로 하나님께만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인생을 다 걸었던 바로 거기에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짐을 받는 시험이 그들 앞에 있었지만,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금으로 만든 신상, 偶像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권고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가 만든 금 신앙 앞에 절하라.

그 때, 그들이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조차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 16하-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그 평강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앞에서도 누릴 수 있었던 바로 그 평강입니다. 그 평강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그 평강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항여 내 인생의 가치변화로부터 주어지는 평강입니다. 그 평강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이기도 합니다. 人生의 비전이 바뀐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평강이지요.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난 이후에, 이전까지 인간적으로 자랑스러워하던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害로 여겼습니다. 排泄物로 여겼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비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내 主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 인생의 존재의미를 발견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비전이 바뀜으로 소유하게 된 평강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시고자 하시는 평강이, 바로 이러한 평강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인 저에게도 주신 平康이 있습니다. 그 평강은, 인간적인 욕심과 자유를 기대하지 않음에서 주어지는 平康입니다. 4년 전에, 세 목사가 공동으로 높은뜻 숭의교회를 개척할 때, 어리석고 부끄러운 고백이긴 하지만, 솔직한 제 마음 깊은 곳의 심정은, 목회적인 자유를 누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높은뜻 숭의교회를 개척을 할 때 소위 말하는, 제도권 교회로부터 오는, 목회적인 스트레스와 갈등을 얼마간은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처음으로 저는, “야, 목사의 자유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이제는, “소신껏 목회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욕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추구하고자 했던 그 목회적인 자유로움의 욕심은, 불과 6개월도 가지 못해서 잘못된 자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9, 35-10, 4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牧者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제가 추구하고자 했던 그 목회적인 自由함의 慾心이 다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불쌍히 여기시며, 사역하셨는데…/ 감히 제가 무어라고/ 인간적인 편안함과 자유를 구하고 있단 말인가? 그 때, 저는 悔改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自由하는 法을 새롭게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무리들을 矜恤히 여기시면서 사역하셨던 것처럼, 바로 그 주님의 마음을 품고 牧會하는 것이, 목사가 누려야 하는 진정한 목회적인 자유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하신 主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진정한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강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주시는 평강입니다. 그 평강은, 주님의 복음말씀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그 평강은, 가치의 변화로부터 주어집니다. 비전이 바뀜으로부터 주어집니다. 主님의 말씀으로부터 주어지는 평강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과 삶의 진정한 평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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