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장 39-43절 예수님의 VIP(6) 한 행악자 - 이동원 목사
설교본문 : 눅 23장 39-43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VIP(6)한 행악자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서양격언에 “참호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There are no atheists in foxholes)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이 위기에 처하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하여 인생이 가장 보편적으로 부르는 것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남편도 아내도 선생님도 부처님도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기는 오히려 인생들에게 하나님을 찾는 구원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여기 있는 먼저 하나님을 믿으신 대부분의 성도들이 경험한 진실일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다가 인생을 끝마치는 예외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두 가지 유형의 대조적인 케이스를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의 장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는 두 행악자 혹은 두 강도 사이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자기 옆에 계신 분이 자신을 구원할수 있는 메시아 구주이심을 깨닫고 그에게 도움을 호소하여 구원의 약속을 받았고, 또 한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다가 죽어 갔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39절을 보십시오. “달린 행악자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의 반응을 대표하는 언어가 무엇이었습니까? 비웃음과 비방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비방하고 조롱하는 자리에 선 것입니다. 인간이 마음먹으면 이렇게 끝까지 악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나 또 다른 행악자의 전혀 다른 부르짖음을 들어 보십시오. 42절입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리고 그는 마침내 예수님에게서 어떤 약속을 받았습니까? 4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구원을 약속받은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반응은 얼마나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까?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물론 우리들의 특별한 관심은 구원을 약속 받은 강도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극적인 회심에서 그 무엇보다 소중한 구원의 진리를 배울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한 영혼의 구원 사건을 통해서 구원의 조건과 결과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구원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우선 그의 구원의 조건은 그의 선행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아주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행악자였다고 말합니다. 악을 행한 자라는 말입니다. 본래 십자가형은 로마의 통치시절 최고의 악질범들에게 내리는 형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마지막 순간에 회개를 했기에 이제부터 회개한 자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회개하자마자 죽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구원은 그의 선행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선행을 추구한다 해도 그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는 것을 아십니까? 선행자체가 바람직한 것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어떤 선행으로도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이 행악자의 구원은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그의 구원의 조건은 단순히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그가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에게 구원을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달리심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신의 범죄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임을 이 강도조차도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자신의 죄로 이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인정하고 자복함이 용서에 이르는 길임을 일관성있게 강조합니다. 신약성경의 한 구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리라”(요일1:9) 이제는 구약 시편32:5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순간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자백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나아와 죄를 자백하고 구원을 호소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인간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법정도 최후의 심판자는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메시아의 나라만이 완전한 공의가 실현된 유일한 나라이며 메시아되신 그분만이 인류를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회개한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를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회개한 강도는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원과 심판을 위해 보내신 메시아 곧 구세주로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분 메시아되신 주님에게 자신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지금 이 강도는 바로 그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 예수의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예수가 바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행전4:12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이제 당신도 당신의 구원을 위해 예수의 이름을 불러 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마 어떤 분은 이 악행을 행한 강도야 그런 용서, 그런 구원이 필요하겠지만 비교적 양심적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도 그런 구원이 필요하겠느냐고 물으실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악행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죽하면 이런 서양 유머가 생겼겠습니까? 유머니까 지금 말씀드린 직업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잘 양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느 서양 부자가 죽어 가면서 임종의 자리에서 갑자기 자기 주치의사와 전담 변호사를 불러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왜 하필 이 시간에 그들을 부르시냐고 했더니 “내가 두 강도 사이에서 죽고 싶다”고 대답했답니다. 의사와 변호사에게 너무 많은 돈을 쓴 것을 풍자한 유머이겠지요. 그러나 이 유머는 어떤 고상한 직업도 어떤 고상한 인생도 죄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줄 따름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의인이나 성자라는 말은 모두 상대적인 인간 묘사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런 유머도 있습니다. 외국의 시골 마을에 악동으로 유명한 형제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 형 되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니다. 동생은 형의 장례식을 치러야 할 터인데 동네 모든 성직자들이 장례 주례를 회피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만일 자기 형 장례식을 주례하고 자기 형에 대하여 성자라는 말만 해 주면 무려 일만불의 사례를 하겠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한 기개가 있는 젊은 성직자가 주례를 자원했습니다. 장례식장은 호기심에 찬 마을 사람들로 만원사례를 이루었습니다. 도대체 이 형편없는 인간을 이 성직자가 어떻게 성자라고 부를 것인가가 관심이었습니다. 주례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 고인과 형제는 우리 마을에서 악인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 죽은 형은 살아있는 동생에 비하면 차라리 성자라고 할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선도 악도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강도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구원은 이루어 졌습니다.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구원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구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삶의 약속입니다. 하나는 낙원의 삶의 약속이고, 또 하나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약속입니다. 낙원은 영어로는 파라다이스(paradise)입니다. 궁극적인 천국은 파라다이스 곧 낙원입니다. 천국이 낙원일수 있는 것은 죄와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와 고통이 해결된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성경이 스스로 묘사하는 궁극적인 천국의 상태에 대하여 들어 보시겠습니까? 계시록21:4의 말씀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슬픔이 없고 눈물이 없고 애곡이 없고 이별이 없고 사망이 없는 곳-어떤 곳일까요? 그곳이 바로 회개하고 죄 사함 받은 주의 백성들을 위해 예비 된 낙원 곧 천국인 것입니다. 그 천국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인생은 결론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천국이든가 지옥입니다. 구원이든가 멸망입니다. 어떤 결론을 원하십니까? 당신의 인생은 어디로 향하고 계십니까? 구원은 낙원의 소망을 이루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낙원을 찾는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낙원을 유토피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유토피아(유/없음+토포스/장소)라는 말은 ‘그런 곳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지상에는 낙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낙원을 준비하고자 저 영원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14:2-3)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이 지상을 떠나기 전에 주신 약속의 말씀을 읽어 보실까요? 요한14:6의 말씀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구원의 또 하나의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단지 죄와 고통이 없는 낙원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가 충만히 거하는 곳입니다. 여기 본문에 회개한 강도에게 주신 약속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낙원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입니다. 낙원에 예수님이 안계시다면 낙원은 낙원일수 없습니다. 물론 완성된 낙원은 아직도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이 땅 에서도 부분적이나마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아직도 죄와 고통이 존재하지만 구주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그의 다스림을 경험하며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 이런 찬송(495장)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후렴)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 죄 사함 받고/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2)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3)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내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마음을 열어주는 101한가지 이야기(Chicken soup stories)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부부가 어느 휴일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다가 갑자기 그들의 가정이 작은 천국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남편이 “하나님 저희 가정에 천국을 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감사 기도를 드리는데 아내의 마음속에 이런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그들이 경험한 천국의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니까 남편도 “그럼 오늘 누군가와 꼭 천국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지”하고 거들더랍니다. 그래서 오늘 누군가와 이 천국의 기쁨을 나누게 해달라는 기도로 아침 기도를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그날 점심에 부부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한 중년의 여인이 혼자 쓸쓸히 식사하는 모습이 부인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천국의 기쁨을 나눌 대상이 저 여인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떻게 하지?”하고 묻습니다. 잠시 묵도하던 부인이 제안을 했습니다. 자기가 엽서 한 장을 쓰겠으니 당신이 저 여인의 식사비를 지불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부인이 오늘 하늘 나라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 식사비를 지불하고 간다는 내용을 적고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시기를!”하는 인사카드와 함께 남편은 그가 이 여인의 식사비를 지불한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자리에 돌아와 식사를 계속했습니다. 잠시 후 식사를 끝낸 여인이 식사비를 지불하려고 카운터로 가면서 자신의 식사비가 지불된 것과 누군가가 카드 한 장을 남겼다는 것을 알고 카드를 읽어 내려가던 그 여인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카운터 옆자리에 앉아 무엇인가를 노트를 적기 시작합니다. 멀리서도 노트를 꺼내 무엇인가를 기록하던 여인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한참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가던 여인이 카운터에 있는 분에게 뭔가를 부탁하며 황급하게 식당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잠시 후 이 부부가 받아든 노트 쪽지에는 이런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누구신지 모르는 하나님의 천사에게, 저는 교회를 꽤 오래 다녔지만 요즈음 하나님도 천국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사랑이 없는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한 여인입니다. 사실 오늘 마지막 근사한 식사를 이 식당에서 하고 세상을 떠나기로 했는데 나는 여기서 다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고 다시 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신은 천국에서 보낸 천사입니다. 감사합니다. 교회로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초대 받아 오신 모든 분들이 또한 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천국의 선물을 받으시고 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