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누가복음

누가복음 17장 11-19절 감사, 또 감사 - 하용조 목사 설교

재영구리 2023. 3. 19.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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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눅 17:11~19
설교제목 : 감사, 또 감사
설교자 : 하용조 목사님 (추수감사절)

성도의 삶, 감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 ‘감사’라는 말보다 위대하고 복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언행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감동이 가득해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에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나 생활 현장에서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손해보고 핍박을 받는다 해도 스스로 돌아보아 감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곧 찬양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두 가지 독특한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하라’와 ‘찬양하라’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시 103:1).” 이렇듯 ‘찬양하라’와 ‘감사하라’는 선포가 시편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찬송가 23장 1절에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9~20절에“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감사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입술은 항상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고통을 많이 겪고 시련의 폭풍을 지나온 사람들에게 참된 감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들은 감사의 깊이와 복을 잘 모릅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 절망에서 다시 인생을 찾은 사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여겼다가 회복된 사람들에게 참된 눈물이 있고 기쁨의 감사가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고통 후에 있고, 은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을 때, 모든 고통과 불가능의 벽을 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확인할 때 감사가 시작되고, 받은 은혜를 고백할 때 감사는 흘러 넘치게 됩니다. 은혜를 마음 속에 갖고 있으면 감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은혜를 확인하고 고백할 때 참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주위에 나눠줄 때 감사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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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문둥병자

본문 말씀에서 고통 가운데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기적을 경험하는 열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문둥병자들이었습니다. 11~13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도중 한 마을에 들러 생각지도 않게 문둥병자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우연은 하나님의 필연입니다. 우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하나님의 섭리였고 계획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을 만날 가능성, 기대, 희망이 없었지만 어느 한 순간에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굉장히 압축돼 있기 때문에 행간을 잘 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엄청난 사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문둥병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접촉을 금지 당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죽음의 항해에 나선 배에 올라탄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고 미래의 희망을 전해줄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하늘을 봐도 그들에겐 살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말해주는 하나의 그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 마약, 폭력 등으로 인해 지옥을 만들어 가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왜 문둥병에 걸렸을까’라고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라고 질문해도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돌을 던지고 침을 뱉으며 욕하고 손가락질합니다. 이런 문둥병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 12절에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만 멀리 서서 소리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의 그림자라도 밟고 싶은 심정으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의하면, 당시에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간질병자, 중풍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까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게 하시며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무엇보다 문둥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소문을 듣고 ‘예수라는 분은 누굴까? 우리도 그분을 만나볼 수 있을까? 예수의 그림자라도 만져봤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들은 소리쳤습니다. 아마 그 소리는 비명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예수님께 표현했을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목이 쉬도록 소리쳤을 것입니다.

14절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즉각 응답하시다’는 뜻으로 아주 간단하게 설명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치는 문둥병자들을 보시고 그냥 지나치시지 않습니다.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께서 즉시 간단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제사장들을 찾아가다가 깨끗해진 자신의 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결정

우리는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쳐주겠다’고 하시지 않고 ‘제사장들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시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께서 ‘이미 네 병을 고쳤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실 때, 기적을 베푸시기로 이미 결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베푸실 때도 ‘물을 떠서 연회장에 갖다 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실 결정을 이미 하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나옵니다. 그는 큰 용사이지만 문둥병자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문둥병을 고치려고 했지만, 아무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요단강에 가서 네 몸을 일곱 번 씻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이 갈등한 부분이 성경에 나옵니다.“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왕하 5:12)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곧 나아만 장군은 순종하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옷을 벗고 요단강 물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의 몸에 나 있는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여섯 번째 요단강 물에 들어갔을 때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 들어갔을 때 마치 어린 아이 살이 같이 희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비가 오지 않았을 때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섯 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째 기도를 하고 마쳤을 때, 한 사환이 ‘저기 하늘에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같이, 이미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복을 받으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들에게 믿음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길 원하십니다.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비밀

둘째, 주님께서 ‘믿음으로 복을 얻는다’라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즉시 제사장들에게로 향합니다. 한편, 그들의 마음은 몹시 불안했을 것입니다. ‘혹시 가다가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제사장이 거짓말한다고 할 텐데…’. 이런 의심, 회의, 불안, 두려움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에 이르기 전에 의심이 있고 불안과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를 뚫고 나아갈 때 믿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여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들에게 가기로 결정하고 발걸음을 옮겼을 때, 자신들에게 큰 변화가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문둥병으로 일그러졌던 얼굴들이 변한 것입니다. 서로 만져 보며 놀라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적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적이 계속되는 현상이 곧 자연입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기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상한 일이 생기면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라고 말합니다. 해가 한 번 서쪽에서 떠야 재미있지 계속 뜨면 자연 현상이 되고 맙니다. 사실 우리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기적입니다. 내가 숨쉬는 것, 살아 있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연을 주셨지만, 때로 그 자연을 파괴하시고 기적을 베푸시기도 합니다.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제사장들을 만나기 전에 벌써 문둥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상징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다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합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합니다. 그때 앉은뱅이는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걸으며 뛰어 성전으로 들어가 손을 들고 찬양했습니다. 그의 눈에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미문에 앉아 구걸하면서 자신도 성전에 한 번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일어섰을 때 맨 먼저 성전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찬양했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기쁨과 찬양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입니다. 15, 16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자 순식간에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어린 아이 살 같이 깨끗이 된 사실 앞에서 그들은 놀라며 감사하고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자신이 치유 받은 것을 알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요즘은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배경을 보고 결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혼수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좋고, 남자가 좋아서 서로 결혼해야 합니다. 남녀의 재산이 좋아서 결혼하면 불행해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좋아해야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적을 좋아하면, 기적이 끝났을 때 감사도 끝이 납니다. 기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문둥병자 열 명 중에 한 명은 기적도 좋았지만,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기적에 만족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본다면 기적에 감사하는 사람이 십 분의 구이고, 기적을 베푸시는 분에게 감사하는 사람은 십 분의 일에 불과합니다.  

은혜에 감사하는 사마리아인

15, 16절 말씀에 자신의 문둥병이 나은 것을 알고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큰 소리로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시험에 들지 않고 다른 사람들 오해하지 않게 됩니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신앙 고백을 해야 합니다.

문둥병자였던 한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수님께로 돌아왔다는 점입니다. 이방인인 이 사람은 자기를 구원하신 분이 누구인지, 복과 기적을 베푸신 분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감사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감사는 복이 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주님께 감사를 고백하고 드릴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진 않지만 나머지 아홉 사람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기적은 복의 시작이지 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의 완성은 그 기적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18, 19절 말씀입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어찌하여 유대인들은 한 사람도 없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방인 한 사람만 나를 찾아왔느냐’는 뜻입니다. ‘내가 진정 자유와 구원을 주기 위해 기적을 베푼 것이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로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문둥병 고침을 받고 구원의 선물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육신의 병고침을 받고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차라리 썩어질 육신은 병들었다고 해도 영혼이 구원받는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이겠습니까? 오늘 모든 성도님들이 주님의 기적에 감사할 뿐 아니라, 구원을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올해 추수감사절을 맞아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 기적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우리의 감사가 고백이 되게 하시고 감사가 응답이 되게 하시며 감사가 보답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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