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 11-24절 탕자의 귀환 - 조용기 목사
설교본문 : 누가복음 15장 11-24절
설교제목 : 탕자의 귀환
설교자 : 조용기 목사님
오늘 이 시간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 탕자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아버지의 권위와 규율이 싫어서 그것을 벗어나 먼 나라로 가서 술과 여자와 도박과 쾌락으로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궁핍하게 되어 나중에는 먹고 살수가 없게 되어서 돼지 치는 자로 전락한 비참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돼지 소굴에 들어가서 돼지를 치며 주엄 열매를 먹고살다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권위와 규율이 결코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참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두 손을 활짝 펴고 따뜻하게 받아 주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친히 타락한 일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접하실 것이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첫째로, 여러분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주님이 깨닫기를 원하시는 바를 한번 상고해봅시다.
한 시골에 한 아버지가 큰 농사를 지으며 많은 종들을 두고 거기에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그런 큰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아버지에게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 농장은 아버지가 주권을 가지고 아버지가 세운 규율 밑에서 가족들이 다 일사불란하게 살면서 생활합니다. 아버지의 주권과 아버지의 규율 하에 있을 동안에는 그 아버지가 가족을 다 돌봐주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 라는 것을 하나 없이 아버지 책임 하에 아버지의 힘으로 돌봐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째 아들이 그 아버지의 주권에 실증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세운 규율이 싫고 먼 나라에 가서 아버지 없는 곳에서 실컷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놀며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아버지 품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내게 속한 분깃을 내게 주소서." "내게 주소서."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고 곧장 청산해서 아버지의 주권과 아버지의 규율이 없는 먼 나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제 아버지의 권위가 없고 규율이 없으니까 자기 의를 버리고 방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아들은 어찌할 수 없이 그만 먼 나라에서 인본주의에 떨어지고 이기주의, 쾌락주의, 허랑 방탕 속에서 술과 여자와 도박과 세속에 물들어서 있는 것을 다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서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 나라에 기근이 닥쳐서 이제는 구복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점점 비참하게 되어서 나중에는 가장 인간으로서는 천한 직업인 돼지를 치는 노동자로 전락하고 말은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가는 길이라는 것을 주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돌보시는 에덴낙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낙원을 친히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를 거기 두어서 살게 했는데 그 에덴낙원 가운데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많이 나게 하시고 낙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만 거기에는 아버지의 주권이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아버지의 규율이 있어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주권과 규율이 바로 선악과 열매인 것입니다. 선악이란 무엇이냐? 좋다 나쁘다라는 결정을 하는 지도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다 자기 마음대로, 내가 좋은 대로 행하고 내가 나쁜 것을 안해서 모두다 지도자가 되면은 콩가루 집안인 것입니다. 한 집안에도 아버지가 그 집안의 대소사를 좋다 나쁘다 결정합니다. 자식들이 다 자기 마음대로 좋다 나쁘다 결정을 하면 지도자만 있고 따라가는 사람이 없어 그 가정은 풍지박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만이 다스립니다. 좋다 나쁘다라는 결정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그리고 그 규율을 지킬 때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아버지의 돌보심을 받으며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주권과 아버지의 규율을 지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를 영원히 사랑과 은혜로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꾀임에 빠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권위와 법을 무시하고 인본주의적 독립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주권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짓밟아버렸습니다.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주권과 아버지의 규율이 싫었습니다. 먼 나라로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먼 나라로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린 나라 곧 인본주의 세계로 떠나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사는 사람들은 모두다 먼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사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계명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본주의에서 사람들은 이기주의와 탐욕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이후 아버지의 주권을 떠나고 아버지의 계명을 떠나서 인본주의로 사는 사람. 그 세계에는 기근이 다가와 있습니다. 온 세상은 역사 이후로 지금까지 기근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진실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 살면서 수고하고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주권과 아버지의 규율을 떠나서 먼 나라에 와서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자제력을 잃고 이기주의와 탐욕과 정욕 속에 살게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삶을 탕진하고 기근에 빠진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세계는 의의 기근에 빠졌습니다. 의로움이 없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어느 곳에나 꽉 들어차 있습니다. 거룩함의 기근에 들었습니다. 더러움과 추악함이 꽉 들어차서 생각이 더럽고 말이 더럽고 행동이 더럽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기근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사랑, 사랑하는데 타락한 사랑만 생각합니다. 이기주의적으로 "내게 주시옵소서." "내게 달라." "나를 사랑해 달라." 이것은 타락한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시간을 주고, 물질을 주고, 관심을 주고, 노력을 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이 참사랑인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의 기근이 들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웁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참사랑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며느리도 시어머니를 참사랑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부모자식간에 형제간에 이웃간에 사랑의 기근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 인본주의로 사는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사랑이 그리워서 허덕이고 방황하지마는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믿음의 기근들이 들어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속이고 속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그 때문에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기근이 들었습니다. 소망의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사십대나 오십대가 되면은 대게 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젊을 때 생각하지 않은 죽음을 왜 생각하느냐? 주변에서 친구들이 죽어갑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떠나갑니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속에 파도치는 생각이 있습니다.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살다가 죽느냐.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치고, 애를 쓰더니 너도 가고, 나도 가고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릴 수가 있는가? 이게 뭔가. 사는 것이 이것인가? 기껏 이게 사는 것인가?" 더구나 사십대 여성들은 한 평생을 남편을 섬기고 자식들 기른다고 발버둥치다가 이제는 자식들이 다 커서 한두 사람 나가게 되고 남편은 자기에게서 관심이 떠나가고 사회생활에 복잡하게 뛰어다니게 되면 그 다음엔 허공에 뜨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이냐?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여태까지 남편과 자식 위해서 노예생활을 해왔는데 이제 나는 무엇인가?" 허무가 그 영혼을 뒤흔들고 결국엔 우울증에 빠지는 여성들이 절대 다수로 많아지는 것입니다. 소망의 기근입니다. 거기에다가 건강의 기근이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건강 하려고 해도 영육간에 병이 듭니다. 물질의 기근이 옵니다. 먹고사는 것이 힘이 듭니다. 애를 쓰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살고 그 무엇보다도 영생의 기근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영원한 영생의 기근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버린 인생은 결국 인본주의로 서서 자기 중심으로 인생을 살겠다고 했다가 크나큰 기근을 당해서 그들의 삶 속에 참으로 살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깊은 교훈을 배워야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권위를 무시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면 우리는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타락을 하면 이기주의와 탐욕과 세속에 들어오고 육신적으로 방종하게 되면 그 결과로 우리의 마음속에 기쁨의 기근이 다가옵니다. 평안의 기근이 다가옵니다. 소망의 기근이 다가옵니다. 믿음과 사랑의 기근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고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 오늘날 고통이 다가오고 있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주권을 멀리하고 나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벌써 타락의 시작인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이기주의와 세속주의가 들어오면 마음에 고통이 다가옵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에는 말세에는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지마는 실제로는 하나님의 주권을 저버리고 계명을 저버리고 인본주의로 사는 고통의 시대가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절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여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오늘날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과 계명을 짓밟는 것이 바로 고통이요 절망이요 슬픔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권위와 아버지의 법이 싫어서 먼 나라로 도망을 쳐서 그 결과로 말미암아 허랑 방탕하고 기근이 들어와서 돼지 소굴까지 내려가 극심한 고통을 당한 이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살도록 만듦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 품속에 살고 하나님의 에덴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고통이요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절망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둘째로, 이 청년은 그곳에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로 각오를 했습니다.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긍휼이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우리가 멀리 멀리 떠났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자복하고 돌아오면 받아주십니다. 이 청년은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먹을 것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는구나. 우리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인데 나는 여기서 굶어죽는 구나. 그러니 여기서 굶어죽을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가자.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서 아버지여, 내가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날품꾼으로 보아주시옵소서. 그리고 돌아가야겠다. 그래서 날품꾼이 되어서 아버지 밑에서 배 안 골고 살아야겠다." 그는 이제는 깨어졌습니다. 그는 "인본주의에서 아버지를 중심으로 아버지의 명령과 아버지의 주권에 순종하고 아버지 규율을 받드는 생활로 들어가야겠다. 나는 이제 겸비하게 깨어져서 교만하지 않겠다." 각오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장면이 여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현실에 삶의 고통과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두움 대신에 빛을, 무질서 대신에 질서를, 죽음 대신에 생명을, 가난 대신에 부요를, 추함 대신에 미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자식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자가 있겠는가?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내 잔이 넘친다고 다윗은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현실적인 삶이 이렇게 고통스럽고 괴로운데 우리는 좋은 하나님께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좋으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권세와 계명에 순종해야겠다는 깨달음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참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도록 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마음에 결단하고 죄를 회개하고 돌아서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죄악을 고백하고 자복하고 그리고 돌아서서 자기 중심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겸손하게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해서 늘 부르는 존 뉴톤의 노래가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는 이 노래의 존 뉴톤은 탕자였습니다. 이 사람의 어머니는 정말 좋은 신자로서 그 아들을 위해서 주야로 눈물로 기도했지만 이 사람은 노예 상인이 되어서 선장을 앞세우고 아프리카 대륙에 가서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을 총, 칼로 잡아 대서양을 건너 북미와 남미에 팔아먹은 인육시장의 폭한이었습니다. 그는 대서양을 건널 때 술에 취하고 취기가 올라오면 생사람을 끌어 올려서 배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따라오던 상어 떼가 그를 잡아 물면 사람이 발버둥을 치고 그것을 보고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그는 악마와 같은 인간이었는데 한번은 거대한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가 파산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살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때야 그는 자기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이여" 자기는 너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스스로 아버지께 나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어머니를 의지합니다. "내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이여, 내 어머니가 진실하게 아버지를 섬기고 기도했지 않습니까? 내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살려주십시오. 내가 이 위기에서 벗어나면 이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사람은 죽음의 위기에 부딪치게 되면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배가 파선을 면하고 불란서의 어떤 해안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길로 배에서 내려서 맨발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었기 때문에 그 죄과로 말미암아 자기도 노예처럼 살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구걸하면서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그는 전도자로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흉악한 죄인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니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고 영생을 그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는 탕자이나 하나님 주권을 다시 인정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돌아서면 주님께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영접하사 하나님께서 품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이 아들은 마음도 몸도 병들고 누더기 옷을 입고 아버지께 나올 때 먼 곳에서 아버지가 보고 아들인 줄 알고 뛰어나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여,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으니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합니다. 날품팔이로 고용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도 그 아들을 껴안았습니다. 퇴비 냄새가 나고 돼지 배설물 냄새가 나는 그 아들. 머리가 삼발이고 초췌한 그 아들. 이 아들을 그 아버지가 껴안았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끌어안겠어요? 그리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종들보고 하는 말이 "제일 좋은 옷을 갔다 입혀라. 가락지를 가져다 끼워라. 신발을 가져다 신겨라. 우리에 가서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 정말 놀라운 말입니다. 이 심정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심정인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과 나를 초청하기 위해서 우리가 돌아올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의 불의를 대신 당했습니다. 그는 저주를 짊어지고 죽음에 찢겼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온갖 고통을 다 당하면서 탕자인 우리들이 돌아올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도저히 형언할 길이 없습니다. 계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찢은 몸을 통해서 십자가 밑에서 그 피를 흘린 밑에서 우리들을 영접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방탕하여 하나님을 떠나버린 우리들, 인본주의로 이기주의로 육신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영접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보혈을 의지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말합니다. "누더기 죄악의 옷을 벗기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로 값 주고 산 의의 옷을 입혀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서를 받고 영원한 의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용서받은 의인으로 만들어서 아버지 앞에 나올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의인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청산해 버렸습니다. 우리를 죄 없는 의인으로 만드셨습니다. "누더기 옷을 벗기고 의의 옷을 입혀라. 그리고 그에게 반지를 끼워주어라." 이 반지는 무슨 의미입니까? 옛날에 가족들은 아버지 이름, 어머니 이름, 형제들의 이름이 새긴 반지를 낍니다. 그러면 그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날 때 반지를 빼서 내어 던졌지마는 아버지가 "다시 반지를 끼워주어라. 내 이름, 제 어미의 이름 그리고, 형제들의 이름, 자기의 이름이 기록된 반지를 끼워주어라." 이것은 이제는 가족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서 옛사람은 죽고 아버지 세계 속에 태어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서 하나님 가족이 되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 반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애 속에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고 아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성령의 이름이 기록된 그 반지를 끼워주었는데 거기에 우리의 이름도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천사보다 높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끼워준 것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나는 돌아와서 바로 하나님의 친자식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복음의 평안한 예비한 신발을 신겼습니다. 맨발로 걸어가는 인생은 갈기갈기 발이 찢어지고 상처투성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살려고 할 때 고통과 괴로움과 상처투성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말합니다. "복음의 예비한 평안의 신을 신겨라. 이제 나의 권속에 들어오고 나의 계명 속에 들어왔으니 이제 나의 예비한 것을 신겨라. 내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예비한다. 내가 현재와 미래를 예비한다. 내가 예비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평안이다. 평안의 예비한 신발을 신겨라." 신발은 행위를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행위에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한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평안의 예비한 모든 것을 우리는 소유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평안의 예비한 신발을 신겨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그 계명을 지키고 사는 사람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일평생을 예비해 놓으시고 평안 속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빼빼 마른 송아지를 잡으라. 병든 송아지를 잡으라. 갓 낳은 송아지를 잡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돌아올 때 우리에게 주님은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고 합니다. 살찐 기쁨, 살찐 평안, 살찐 소망, 살찐 사랑, 살찐 믿음, 풍부한 생명을 주는 은총을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야훼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를 헐벗고 굶주리고 궁핍한 삶 속에 내어 던져버리지 안습니다. 우리 아버지 세계 속에 들어와서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해서 하나님은 살찐 것을 아끼지 않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즐기자." 하늘나라의 기쁨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치나이다. 하늘나라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내 이 자식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잃었다가 얻었다. 이제 하나님의 가족이 돌아왔으니 우리가 즐기자."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과 성령과의 교통 속에는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소망이 있고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삽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받들면서 삽니다. 내 중심으로 살지 않고 아버지 중심으로 삽니다. 내 마음대로 살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면서 삽니다. 아버지 중심으로 살고 아버지 계명을 지킬 때 그곳에는 풍성함이 있고 그곳엔 기쁨이 충만하게 넘치게 되고 평안이 있습니다. 금세 안심 내세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먼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기근에 들어서 처참하게 살고있습니다. 찢기고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면, 집으로 돌아오면 여기에는 있을 곳도, 먹을 것도, 돌봐주는 손길도, 평안도, 축복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두손들고 주님께 돌아와야 하고 돌아와서는 아버지 중심으로 그 권위를 절대로 받들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야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언제나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 드리겠습니다.
-기도-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멀리 멀리 떠나갔다가 슬프고도 곤하여 회개하고 자복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주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받아 주시고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원하오니 우리 모든 사람을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아버지의 주권아래 살고 아버지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