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누가복음

누가복음 11장 5-13절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옥한흠 목사

재영구리 2023. 2. 2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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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누가복음 11:5-13절
설교제목 :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절실한 소원 하나

만일 주님께서 지금 이 순간 찾아오셔서 꼭 이루어졌으면 하고 소원하는 기도 제목 한 가지씩을 말하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주저 않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 성령 충만은 제가 평소에 밤낮없이 생각하고 사모하고 기도하는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역시 그러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성령 충만보다 더 절실한 문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신학자요 목회자인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마치 발가벗김을 당한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저처럼 성경을 열심히 가르쳐서 성도를 말씀의 터 위에 굳건히 세우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알고 정성을 다해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분입니다. 그 결과 그분이 목회 하던 교회도 2천 명, 3천 명 계속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은 자기 목회와 교회를 놓고 하나님 앞에 조용히 진단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분이 쓴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는 나의 설교를 충실하게 듣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교인들 가운데 그렇게 설교를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도 삶의 뚜렷한 변화가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다. 영적으로 침체된 사람은 한번 그 침체의 늪에 빠지고 나면 도무지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적인 것에 정신이 팔려 돌아다니기에 바쁘다. 교회 안에 생기는 많은 환자들은 한 사람도 약을 쓰거나 의사에게 매달리지 아니하면 낫는 법이 없고,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전문적인 상담자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지 않으면 회복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도를 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지 안 믿는 사람 하나 전도해서 데리고 오려면 그야말로 진이 다 빠질 만큼 힘들다. 이러한 목회 현실을 놓고 내가 지금 바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김빠지고 능력 없는 삶을 사는 게 정상인가? 왜 우리는 이토록 적은 능력만 가지고 씨름을 해야 하는가?"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처한 영적인 현 주소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사역을 하느라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지만 교역자들은 교역자들대로 영적인 갈증을 느끼며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참 아름답게 헌신하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무력감에 젖어 있습니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교회를 지향하면서도 교회 안에서 치료하시는 주님의 능력은 잘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있음으로 해서 주변의 유흥가에 지각변동이 일어나야 할텐데, 교만하기 짝이 없는 주변의 아파트촌 사람들의 의식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야 할텐데, 부패한 이 나라가 의로운 나라로 바뀌어야 할텐데 우리는 그러한 변화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석 교인 만 명이 넘는 교회의 규모에 비해서 너무 무력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가슴아프게 반성하면서 제가 얻은 결론은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사역을 감당하고자 나름대로 열심히 힘써왔습니다만 성령 충만이라는 면에서는 참 부족했다고 봅니다. 제가 성령 충만을 제일 시급한 기도제목으로 삼겠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 목회자나 교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겠습니까? 우리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주일을 지킨다 해도 세상에 나가서 불신자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올무에서 벗어나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 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로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로하는 분이 있습니까?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 앉아 있지만 '빨리 예배가 끝났으면...'하고 시간을 재는 분이 있습니까? 입이 무겁고 기도가 잘 안 되는 분이 있습니까? 주일학교 교사로, 혹은 순장으로 열심히 가르치고, 뛰어다니지만 늘 갈급한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열심히 가르치고 기도하지만 열매가 보이지 않아 애가 타는 분이 있습니까? 전도하고 싶어도 도무지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 기가 죽어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무리 사회가 더러워지고 사람들이 짐승처럼 잔인해져가도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다는 분이 있습니까? 이 모두가 성령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이런 예를 들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절실한 기도 제목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구하라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성령 충만을 구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교훈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저는 오랫동안 이 말씀의 의미를 곡해하고 있었던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을 때 이미 성령이 그 마음속에 들어와 계시는데 무슨 성령을 또 달라고 하느냐?' 하는 생각이 제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은근히 신학적으로 유치한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자란 분들이 가지고 있는 거의 공통적인 경향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지난 수 년 전부터 저는 우리가 이 본문에 대해 크게 잘못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셔서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 성령이 우리 예수 믿는 각 사람에게 믿는 순간에 임하셔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성숙해짐에 따라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제자훈련을 받고, 성경을 많이 연구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 영적인 영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흔히들 제자훈련을 받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면 인격과 사역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아름다운 제자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양은 그럴 듯한데 그 속에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 그 이상의, 능으로도 안되고, 힘으로도 안되고 오직 성령으로만 되는 그런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슥4:6).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령을 달라는 기도 외의 다른 기도는 모두 이차적인 것들입니다. 낮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추운 겨울 날 갑자기 난방이 끊겨버린 아파트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하루 밤이나 이틀 밤 정도는 이불을 두 겹, 세 겹 덮고라도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계속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때 모든 식구들에게 난방보다 절실한 문제는 없습니다. 부부 사이가 안 좋은 것도, 감기가 걸려서 기침을 하는 것도, 심지어 자녀가 공부를 못해서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성령의 난방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해야 받는 선물

13절은 우리가 성령에 대해 알아야 할 세 가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13절 끝 부분을 보십시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제일 우선 순위를 두고 기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11장 앞부분까지 성령에 대한 언급을 일절 않으시다가 왜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에야 비로소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제목 많겠지만 성령보다 더 절실하고도 중요한 것이 없음을 깨우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과 병행을 이루는 구절이라 할 수 있는 마태복음 7장 11절을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선물 중에 가장 좋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평소에 불만스럽게 여기던 것들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 평소에 "나는 못해." 하고 체념하던 삶이 불가능이 없는 삶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령은 좋은 것 중에 좋은 것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성령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고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중생을 받을 때 우리 마음에 오시는 성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오신 그 성령이 다시 한번 우리에게 2차, 3차로 은혜를 주시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한번 성령을 모시는 것으로 평생동안 성령 충만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천국일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서 보나 많은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을 놓고 보나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성령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합니다. 구하지 않으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장로교 신학을 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잘 닦여지고 체계적인, 5백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이 신학에 바탕을 두면 아무리 강풍이 몰아치고 지진이 나도 심하게 요동치 않습니다. 이것은 장로교 신학이 가진 큰 장점입니다. 그러나 장로교 신학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장로교 신학의 전형적인 틀 속에 안주하는 한 "성령을 구하라"는 말이 귀에 안 들어옵니다. '성령이 이미 우리 안에 계신데 감사하면 되지 무슨 성령을 또 구하느냐.'는 생각에 "성령을 구하라"는 말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 초반에 접어들면서 세계 교회에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학이나 체계적인 교리도 없는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붙들고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하고 간절히 구하자 하나님이 놀랍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한번 있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시작된 성령의 불길은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이 시점에 이르러는 전세계 교회로 확산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성교회의 교리의 틀에 갇혀서 성령을 구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엉뚱한데서 불을 지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 중 3분의 1은 성령을 구하여 성령과 성령의 역사를  실제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3분의 2는 성령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 구하지 않아서 성령이 어떤 분이신 지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구하지 아니하는 교회는 아무리 교인들이 잘 훈련받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해도 성령은 그 속에서 능력 있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선교 지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 하고 밤낮없이 기도하며 사모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성령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행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이미 마음속에 와 계시는데 무엇 때문에 바보같이 또 구하란 말이냐' 하고 구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는 성령이 아무런 역사도 행하시지 않습니다.

전심으로 구하라

그러면 성령을 구하되 어떻게 구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5절 이하에 보면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유대나라는 날씨가 더워 밤에 여행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손님이 들이닥쳤는데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대접을 못하겠으니 빵을 좀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식구들이 이미 옷을 벗고 누워 있는 터라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고, 또 그의 청대로 빵을 준비해 준다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친구는 아랑곳 않고 강청을 했습니다(8절). '강청한다'는 말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매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매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여서가 아니라 그 강청하는 것에 못 이겨 결국 일어나 빵을 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9-10절에서 주님은 이 비유의 교훈을 다시 한번 정리해주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은 세 종류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 가지 표현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이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신 것은 부끄러움을 아예 잊어버리고 전심을 다해서 매달리는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성령을 간절한 마음으로 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각자와 교회 안에 계시사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데, 그분을 모시고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손에 피가 나도록 두드려야 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제가 본문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분명히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사단이나 마귀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이미 모시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빤질빤질하게 신앙 생활하면 우리의 영적 체질을 꿰뚫어 보는 사단은 아마도 옆에서 기뻐 뛰면서 장단을 맞춰줄 지도 모릅니다. '너, 참 잘한다. 너 정도면 수천, 아니 수만 명도 겁 안 난다. 평생 그 정도만 신앙생활해라.' 그러나 우리가 갑자기 "주여, 내게 성령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사단이 정신을 바짝 차립니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큰 일 나겠다. 어떻게 하든지 막아야지.' 하고는 우리의 기도를 집중적으로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역사 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려면 사생결단하고 주님께 매달리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보기 좋게 농락 당하고 맙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심으로 성령을 구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아버지의 확실한 보장

제가 어떤 부인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부인은 굉장히 똑똑한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도자로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성령을 달라고 구하는 자체가 성경적으로 잘못 됐다는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족하지 이미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을 달라고 하는 것은 믿음 없는 행동이요, 모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령의 은사 운운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예 교회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남편이 병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인은 자신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도 전부 사임해 버렸습니다. 3주 동안 기도원에 들어가서 눈물로 하나님과 성령을 향한 자기의 태도를 회개했다고 합니다. 교만했던 자아가 눈물로 함께 용해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작은 규칙을 가지고 성령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은혜 받는 사람들을 방해했던 죄를 가슴을 치며 회개한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성령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동경과 갈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73:25). 그는 시편 기자가 가졌던 그런 간절함을 가지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은 드디어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풍성한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셨고, 그를 세계적으로 놀랍게 들어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에도 우리가 지금까지 구하지 않고 사모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너무 건방진 태도요 죄라고 할 것입니다. 저는 그 모든 책임이 저와 장로교 신학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자매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아버지 비유를 통해 우리가 성령을 구할 때 응답을 주시리라는 확실한 보장을 주셨습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간절히 구했음에도 성령을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악한 아비보다 못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아비라도 자식에게만은 좋은 것을 준다면 선 그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라도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확신과 기쁨으로, 성령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부요하신 데 그의 자녀 된 우리가 가난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거지가 아니라 왕자입니다. 이미 모든 좋은 것을 보장받았음에도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거지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 그의 자녀 된 우리가 무능력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할 것이 참 많지만 다른 무엇보다 성령을 구합시다. "하나님이여, 성령을 주옵소서. 그래서 내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옵소서. 이 교회의 능력과 권세가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성령강림 주일을 맞는 우리 모두의 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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